한글 창제에 숨겨진 비밀 이야기 과학 실록 (24) 2008년 10월 02일(목)
매년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예전에는 달력에 빨간 글자로 인쇄된 법정공휴일이었지만, 노는 날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그 후 기념일로만 명맥을 유지해오던 한글날은 2006년 국경일로 지정되는 경사를 맞았지만 여전히 공휴일의 지위는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한글날이 정해질 수 있었던 것은 한글이 창제과정과 시기가 정확히 알려진 문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인정받아 훈민정음해례본은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즉, 세종 혼자서 창제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평소 몸이 약했던 세종이 그처럼 엄청난 작업을 혼자 해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한글 창제 전의 몇 년 간은 세종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던 때라 정사를 돌보는 것은 물론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경연(經筵)조차 제대로 열기 힘든 상황이었다.
조선 중기의 명신인 이수광도 자신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언서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를 본떴다’고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의 학자인 황윤석과 이능화 역시 한글은 범자에 근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새로 만들어진 훈민정음의 체계와 표기법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이가 불경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그 당시 세종과 가장 가까이 지내던 신미대사가 그 주인공으로 지목된다. |
신미대사가 한글을 창제했다? 한글 창제에 숨겨진 비밀 (하)
2008년 10월 09일(목)
이야기과학실록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설을 뒷받침하는 세 번째 근거는 그가 문종으로부터 받은 법호이다. 문종은 즉위한 지 2개월도 안 돼 신미대사에 대한 제수(除授)를 거론했다. 선왕인 세종대왕께서 제수하고자 했으나 신미대사의 질병으로 미뤄졌으니 지금 제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 것.
존자(尊者)는 큰 공헌이나 덕이 있는 스님에게 내리는 칭호였는데, ‘개국 이후 이런 승직이 없었고 듣는 사람마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실록은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여기서 수성은 신미대사의 속명인데, 풀이하자면 신미대사는 집현원 학사를 지냈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신미대사는 세종대왕에게서 많은 총애를 받았다. 신미대사가 있던 속리산 복천암에 세종은 불상을 조성해주고 시주를 했다. 또 승하하기 불과 20일 전에 세종은 신미대사를 침실로 불러서 법사를 베풀게 하고 예를 갖추어 그를 대우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승려(혹은 신미대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던 분위기에서 그의 운신 폭은 그리 넓지 않았을 것이다. 신미대사가 직접 번역한 불교 경전의 초판본에는 법호가 명시돼 있지만 재판본에는 빠져 있는 걸로 볼 때, 세종 사후에 유생들이 조직적으로 신미대사와 관련된 문구를 모두 삭제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로 인한 슬픔을 이기는 과정에서 불당의 법회를 베푸는 등 자연스레 불교에 빠져들었고, 한글 창제 후 불경의 간행을 우선적으로 진행했을 수 있다. 또한 세종의 아들인 세조도 호불왕(好佛王)으로 불릴 만큼 과감하게 불교중흥정책을 펼쳤다. |
이성규 기자 | 2noel@paran.com 저작권자 2008.10.09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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