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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소식

한글 창제에 숨겨진 비밀 이야기

by 진 란 2009. 10. 26.

한글 창제에 숨겨진 비밀 이야기 과학 실록 (24) 2008년 10월 02일(목)

매년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예전에는 달력에 빨간 글자로 인쇄된 법정공휴일이었지만, 노는 날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그 후 기념일로만 명맥을 유지해오던 한글날은 2006년 국경일로 지정되는 경사를 맞았지만 여전히 공휴일의 지위는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한글날이 10월 9일이 된 것은 1940년 7월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 덕분이다. 이 책은 정인지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이 새 문자인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과 원리에 대해 상세히 풀이한 문헌이다.

책의 뒷부분을 보면 정인지가 쓴 서문 끝머리에 ‘1446년 음력 9월 상순’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이를 근거로 하여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9일이 훈민정음 반포 기념일로 확정된 것이다.

▲ 덕수궁의 세종대왕 동상 

이처럼 한글날이 정해질 수 있었던 것은 한글이 창제과정과 시기가 정확히 알려진 문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인정받아 훈민정음해례본은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럼 한글은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 이런 질문을 하면 너무 뻔한 것을 묻는다는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내올지 모르겠다. 한글은 당연히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만든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1443년 12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을 때까지 집현전 학사들조차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또한 한글 창제 이후 가장 심하게 반발하며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상소한 것도 바로 집현전 학사들이다.

세종의 한글 창제 2개월 후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ㆍ직제학 신석조를 비롯해 김문ㆍ정창손ㆍ하위지 등이 올린 상소문을 보면 그와 같은 정황이 잘 드러난다.

“만일 언문을 할 수 없어서 만드는 것이라면 이것은 풍속을 바꾸는 큰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백관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여 의혹됨이 없는 연후에야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상소문의 내용을 뒤집어 생각하면 한글 창제 작업 전에 재상을 비롯한 문무백관과 일절 상의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또한 집현전 학사 중 대표적인 인물인 성삼문과 신숙주의 경우를 살펴봐도 한글 창제와 별 연관이 없다. 성상문은 한글이 거의 창제되었을 무렵에 집현전에 들어왔고, 창제 2개월 전에 들어온 신숙주는 그 다음해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한글 창제에 관여할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던 셈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유학자들의 모화사상(중국의 문물과 사상을 흠모하고 따르는 정신)이 깊을 때라 미리 알렸더라면 더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을 게 뻔했다.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세종으로서는 한글 창제 작업을 극비리에 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정황들로 보아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글 창제 작업은 누가 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1443년 12월 30일자의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ㆍ중성ㆍ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상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 국보 제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해례본 

즉, 세종 혼자서 창제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평소 몸이 약했던 세종이 그처럼 엄청난 작업을 혼자 해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한글 창제 전의 몇 년 간은 세종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던 때라 정사를 돌보는 것은 물론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경연(經筵)조차 제대로 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럼 집현전 학사들도 모르는 상황에서 비밀리에 누가 세종을 도와주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꼽히는 인물들이 바로 세종의 자녀들인 문종과 수양대군ㆍ안평대군ㆍ정의공주 등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거론되는데, 그가 바로 신미대사이다. 특히 신미대사의 경우 단순히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한글 창제의 주역이라는 설도 있을 만큼 세종 및 한글과의 관계가 깊은 인물이다.

신미대사가 한글을 창제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이유를 추적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한글이 범자(梵字 ;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의 문자)를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설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불교 경전은 범어로 기록된 것이 많았다. 승려인 신미대사는 불경을 번역한 한자에 오역이 많음을 알고는 독학하여 범어 및 티베트어를 비롯한 5개 언어에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범어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세종보다는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를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1443년 12월 30일의 세종실록 기록을 보면 ‘옛 전자를 모방했다’는 내용이 있다. 또 훈민정음해례본의 정인지 서문에도 ‘모양은 본뜨되 옛 전자를 모방했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전자(篆字)란 가장 오래된 한자 글씨체 중의 하나를 가리킨다.

그런데 조선의 학자들이 지은 저서를 보면 한글의 기원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유학자인 성현은 훈민정음 반포 30년 후에 지은 ‘용재총화’에서 ‘그 글은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한글이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조선 중기의 명신인 이수광도 자신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언서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를 본떴다’고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의 학자인 황윤석과 이능화 역시 한글은 범자에 근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볼 때 실록이나 정인지가 언급한 ‘전자’는 곧 ‘범자’의 한자식 표현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한글과 범자의 음운 체계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주장도 나온 바 있다. 오랫동안 한글과 범자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한국세종한림원의 강상원 박사는 자음의 기본을 이루는 아음ㆍ설음ㆍ순음ㆍ치음ㆍ후음의 5가지 음운체계가 범자에도 그대로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순우리말 중 상당수가 범어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아리랑은 범어에서 ‘사랑하는 임’을 뜻하는 ‘ari’와 ‘서둘러 떠나다’는 뜻의 ‘langh’이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라는 것. 이에 의하면 아리랑은 ‘사랑하는 임이 서둘러 떠나다’라는 뜻이 된다.

밥 역시 ‘어머니의 젖’을 의미하는 범어 ‘vame’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농사에 의존해온 우리 민족의 경우 쌀로 지은 밥이 어머니의 젖과 같은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고 볼 때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한글의 범어 모방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서울대 이승재 교수가 발표한 ‘훈민정음 각필부호 유래설’과 관련이 있다. 각필이란 상아나 대나무로 뾰족하게 깎아 만든 필기구로서, 옛 문헌의 글자 옆에 점과 선ㆍ부호 등을 눌러서 표시해 발음이나 해석을 알려주던 양식을 뜻한다.

이 교수가 고려시대의 불교 경전을 조사한 결과 훈민정음의 글자 모양과 일치하는 각필이 무려 17개나 발견되었다는 것. 더구나 자음과 모음의 체계도 각필과 유사한 점이 많음을 볼 때 한글의 범자 모방설 및 신미대사의 한글창제 참여설과 연관시켜 생각해볼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한글 창제 후 실험적으로 만들어진 책이 모두 불교서적이라는 점이다. 석보상절과 능엄경언해는 불교경전이고 월인천강지곡 역시 찬불가이다. 어리석은 백성을 가엾게 생각하여 만든 문자라면 유교를 숭상하던 국가에서 논어와 맹자 같은 유교 경전을 먼저 번역해서 백성들이 읽게 해야지 왜 불경 같은 불교서적들을 먼저 번역했던 것일까.

▲ 훈민정음 반포 재현 행사 

이는 새로 만들어진 훈민정음의 체계와 표기법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이가 불경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그 당시 세종과 가장 가까이 지내던 신미대사가 그 주인공으로 지목된다.

실제로 세종 때부터 연산군 때까지 한글로 발간된 문헌의 65% 이상이 불교 관련 서적이며, 유교 관련 서적은 5%가 채 되지 않는다.

한글 창제와 불교의 연관설은 몇 가지 숫자에도 그 비밀이 숨어 있다.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편찬한 ‘월인석보’의 첫 머리에 실린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세종의 한글 어지는 정확히 108자이며, 그것을 한문으로 적은 한문 어지는 108의 절반인 54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연구 결과 이는 우연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글자를 탈락시키거나 다른 글자로 대체하는 등의 의도적인 조절에 따라 그렇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또 월인석보의 제1권은 정확히 108쪽이다. 이처럼 108을 고집한 것은 불교에서 신성한 숫자로 여기는 108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훈민정음해례본은 모두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훈민정음은 자음과 모음의 28자로 만들어진 문자이다. 33은 불교의 우주관인 33천(天)을 상징하는 숫자이며, 28은 사찰에서 아침저녁으로 종을 치는 횟수와 똑같다.

때문에 한글 창제의 숨겨진 또 하나 목적은 새 문자를 통해 불교를 보급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어쨌든 한글이 창제됨으로써 평민들도 불교의 교리를 알게 되어 불교 포교의 새 전기가 마련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셈이다. (하편에서 계속)



신미대사가 한글을 창제했다? 한글 창제에 숨겨진 비밀 (하)

2008년 10월 09일(목)

이야기과학실록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설을 뒷받침하는 세 번째 근거는 그가 문종으로부터 받은 법호이다.

문종은 즉위한 지 2개월도 안 돼 신미대사에 대한 제수(除授)를 거론했다. 선왕인 세종대왕께서 제수하고자 했으나 신미대사의 질병으로 미뤄졌으니 지금 제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 것.

그러나 졸곡(卒哭 ; 사망한 지 3개월 후에 지내는 제사)을 지낸 후에 제수해도 늦지 않다는 신하들의 만류에 따라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450년 7월 6일 문종은 신미대사에게 ‘선교종 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의 26자에 이르는 긴 법호를 내렸다.

▲ 신미대사가 주로 머물렀던 속리산의 복천암 

존자(尊者)는 큰 공헌이나 덕이 있는 스님에게 내리는 칭호였는데, ‘개국 이후 이런 승직이 없었고 듣는 사람마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실록은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법호 중 ‘우국이세(祐國利世)’라는 말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국이세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는 뜻이다. 억불숭유 정책을 취한 조선에서 신미대사의 법호에 그런 말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곧 세종대왕이 내세운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문종이 우국이세를 굳이 법호에 포함시킨 것은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에 큰 공헌을 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신미대사에게 법호가 내려진 후 잇따른 신하들의 상소와 그에 대한 문종의 반응 또한 흥미롭다. 하위지ㆍ홍일동ㆍ신숙주ㆍ이승손 등은 신미의 칭호가 부당하다며 적극 반대했고, 집현전 직제학이던 박팽년은 강경한 태도를 보이다 불경한 문구를 사용하여 파직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이에 대한 신하들의 직언이 끊이질 않자 문종은 결국 20일 만에 신미의 칭호를 ‘대조계 선교종 도총섭 밀전정법 승양조도 체용일여 비지쌍운 도생이물 원융무애 혜각종사’로 고쳤다.

존자에서 종사(宗師)로 바꾸고, ‘우국이세’란 말은 아예 빼버린 것이다. 대신 그 자리에 ‘중생을 제도하고 일을 잘 되게 한다’는 뜻의 ‘도생이물(度生利物)’이란 문구를 넣었다.

이밖에도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주역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많다. 신미대사의 가문인 영산 김씨 족보를 보면 ‘수성이집현원학사득총어세종(守省以集賢院學士得寵於世宗)’이란 문구가 나온다.

▲ 복천암의 동쪽에 건립되어 있는 신미대사의 수암화상부도. 보물 제1416호. 

여기서 수성은 신미대사의 속명인데, 풀이하자면 신미대사는 집현원 학사를 지냈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신미대사는 세종대왕에게서 많은 총애를 받았다. 신미대사가 있던 속리산 복천암에 세종은 불상을 조성해주고 시주를 했다. 또 승하하기 불과 20일 전에 세종은 신미대사를 침실로 불러서 법사를 베풀게 하고 예를 갖추어 그를 대우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경을 번역, 간행했을 때 신미대사는 이를 주관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석보상절의 편집을 실질적으로 이끌었으며, 그밖에도 많은 불교 서적을 한글로 직접 번역했다. 따라서 신미대사라는 인물이 만약 없었다면 오늘날 전하는 상당수의 한글 문헌이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그럼 왜 세종은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 참여를 단 한 번도 밝히지 않았을까. 또 실록이나 그 당시 전하는 어떤 기록에도 신미대사와의 한글 창제 관련 문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한글 창제를 반대하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거기다 승려가 관여했다고 발표하면 유생들의 반발이 더욱 거셌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때문에 세종은 유학자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그들이 신미대사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 차원에서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 관여를 비밀에 부쳤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한글을 창제한 후 이론적 체계 확립과 훈민정음의 보급 사업을 슬쩍 집현전에 맡겼는데, 이 역시 반발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고도의 전략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실제로 그 당시 조선왕조실록에서 신미대사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매우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실록에서 신미대사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훈민정음 반포 직전인 1446년(세종 28년) 5월 27일이다. 그에 의하면 세종은 “우리 화상(신미대사를 지칭함)은 비록 묘당(의정부)에 처하더라도 무슨 부족한 점이 있는가”라며 그를 칭찬하고 있다.

그런데 신미대사의 호칭 앞에는 ‘간승(奸僧)’ 내지 ‘요망한 중’이라는 글귀가 항상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신미대사의 친동생인 김수온이 벼슬을 제수 받을 때도 형인 신미대사가 요사한 말로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라는 투로 기록하고 있다.

▲ 훈민정음 반포 장면을 그린 그림 

이처럼 승려(혹은 신미대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던 분위기에서 그의 운신 폭은 그리 넓지 않았을 것이다. 신미대사가 직접 번역한 불교 경전의 초판본에는 법호가 명시돼 있지만 재판본에는 빠져 있는 걸로 볼 때, 세종 사후에 유생들이 조직적으로 신미대사와 관련된 문구를 모두 삭제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 참여설은 아직까지 학계에서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하나의 주장에 불과할 뿐이다.

우선, 승려의 참여 증거로 꼽히는 범자모방설의 경우 한글의 수많은 문자 모방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산스크리트 문자인 범자 외에도 티베트 문자 모방설, 일본의 신대문자 모방설, 단군 조선의 가림토문자 기원설 등의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또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한 원나라가 점령국들의 언어를 통일하여 표기할 수 있게 만든 파스파 문자가 고려를 통해 한반도에 들어와 훈민정음의 창제에 영향을 주었다는 시각도 있다.

한편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 정초가 지은 ‘육서략’에서 논리적으로 문자를 만드는 과정이 서술된 부분을 참고하면 한글의 기본 자음자를 모두 만들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떴다는 ‘발음기관 상형설’과 모음은 천지인(天地人)의 모양을 본뜨고 자음은 음양오행설을 이용해 만들어졌다는 설이다.

훈민정음 창제 후 불교 서적의 간행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말년에 불교로 귀의한 세종의 행적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 세종은 훈민정음 반포 전인 1444년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을 잃고 이듬해에는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을,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부인인 소헌왕후를 차례로 잃었다.

▲ 한글의 타 문자 모방설은 여러 가지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그로 인한 슬픔을 이기는 과정에서 불당의 법회를 베푸는 등 자연스레 불교에 빠져들었고, 한글 창제 후 불경의 간행을 우선적으로 진행했을 수 있다. 또한 세종의 아들인 세조도 호불왕(好佛王)으로 불릴 만큼 과감하게 불교중흥정책을 펼쳤다.

한글로 된 불교 서적의 간행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이런 왕실의 분위기와 한글을 업신여기는 유학자들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신미대사가 집현전 학사였다는 영산 김씨의 족보 역시 정식 사료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한 가문의 족보라는 점이 문제다. 족보에는 언제나 과장되거나 아전인수식의 표현이 많이 등장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할 때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이 현재로서는 가장 믿을 만한 정보다. 한글의 창제 원리가 이론적으로 한 점의 흐트러짐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목요연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세종대왕 혼자서 만들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이성규 기자 | 2noel@paran.com

저작권자 2008.10.09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