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 정길연
1
당신은, 일몰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요?
해 기울어 사물의 모서리가 날카로운 예각을 잃기 시작할 어스름에서, 검은 덩어리로밖에 윤곽을 가늠할 수밖에 없을 그 무렵까지, 그러니까 사위와 사물의 경계가 모호해져서 더는 육체의 눈이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그 시간에 이르기까지, 당신은 주로 어떤 기분에 잠기는지요?
물정 모르는 소리라고 하실 테지만 그건 아니에요. 그 일몰의 시간, 어쩌면 하루 중에서 가장 번잡한 시간일 수도 있다는 거, 모르기야 하겠습니까. 각자가 형편과 입장에 따라 다를 테지요. 아마도 업무를 마무리하거나, 더운 저녁을 짓거나, 피하지 못할 술자리 약속에 급히 대어 가느라 쉬 오지 않는 빈 택시를 기다리는 중이거나...... 그러기도 하겠지요.
귀갓길 버스나 전철의 용케 빈 좌석에 지친 몸 주저앉히자마자 끄떡끄떡 체모 없이 졸기도 하겠고, 좀체 끝날 것 같지 않은 일감을 다음날로 떠넘기지 않기 위해 더러는 야근으로 돌입하기도 하겠고, 이 치열한 생존의 현장에 유용하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어학원 같은 곳으로 부리나케 이동하기도 하겠지요. 제대로 된 식사는커녕 간단한 요기조차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욱여넣는 식으로 때우면서 말이지요. 눈에 선하군요.
당신과 그런 딱딱한 얘기를 나누자는 건 아니고요......
한때 숲의 나무들이 정원수처럼 바짝 다가앉은 벽돌집에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집에서 내다보는 바깥 풍경을 무던히도 좋아했지요. 숲 가까이 살아보면서 느낀 건데요, 숲은 사시사철이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다릅니다. 그리고 시시각각 달라집니다. 숲 자체의 호흡도 호흡이려니와, 그 무쌍한 변화는 자연의 빛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빛의 세기와 각도에 따라, 무엇보다 마음의 흔들림에 따라 숲의 질감과 양감이 무궁무진하게 변화합니다.
나는 놀빛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어스름 무렵의 숲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커피 한 잔을 만들어 창가에 그저 잠잠히 다가앉곤 했지요. 보라와 주황과 회청 빛 낙조조차 물러간 다음, 그렇게 서서히 내려쌓인 어둠이 숲과 내 앉은 자리를 완전히 뒤덮을 때까지 꼼짝도 않고 웅크리고 있는 것이었어요. '텅 빔'과 '꽉 참'이 동시에 진행되는 시간 속에 내 정신을 밀어 넣으면서요.
그때, 속으로 중얼거리곤 했습니다. "저 숲을 내다볼 수 있는 이 시간이 허용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생은 남루하지 않다"라고 말입니다. 사실은 여러 가지로 힘들 때였어요. 그래 그렇게 자신을 달래야 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생의 위기를 버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지요.
그 집을 떠난 뒤로는 일몰의 저녁시간을 즐긴 기억이 별로 많질 않군요. 오늘 모처럼 어스레해오는 거실 안락의자에 앉아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다가 문득 꼽아보니 그렇더라는 얘깁니다. 참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거센 파도에 떠밀려 막 어느 한적한 바닷가에 당도한 것 같은, 조금은 안온하고 조금은 눈물겨운, 그런 애틋한 기분...... 당신은 이해하실 테지요.
언제 한번 당신도 만사를 제쳐놓고 날 저무는 창가로 다가가 우두커니 앉아 있어 보세요. 커피 한 잔, 혹은 담배 연기 한 줄기라도 곁들여서요. 일상의 잡다한 문제들을 끌어들여도 좋고,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몽상과도 같은 상념에 잠겨도 물론 좋고요. 그렇더라도 당신의 시선은 일몰의 하늘에 고정시켜두는 거예요. 때로는 그렇게 텅 빈 시간이 더 커다란 유익함일 수 있으니까요.
굳이 분류하자면, 일몰의 시간이야말로 하루 가운데 가장 정신적인 시간대가 아닐까 싶은데요. 성찰과 침잠과 가장 잘 어울리는 시간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내 지극히 개인적인 주장이며, 정서이긴 합니다만.
생의 기미를 아는 당신이 그립네요.
2
물과 하늘이 맞닿아 이룬 수평선이 정면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석회처럼 입자 고운 모래펄은 거의 경사가 없이 밋밋합니다. 해안선을 따라 도도를 만들어놓았군요. 그 넓디넓던 모래펄의 절반을 콘크리트로 덮어버리다니요. 딱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리를 약간 끄는 듯이 저는 중년의 산보객이 지나갑니다. 무릎을 살짝 덮는 코트. 자코메티 풍(風)입니다. 영화 <남과 여>의 한 장면이 떠오르네요.
멀리 두 개의 바위섬이 보입니다. 나는 유리창 안쪽, 밀폐된 실내에서 해조음이 거세된 바다를 무연히 바라보고 있어요. 혼자입니다. 주문한 샌드위치와 커피가 나왔어요. 이런, 헤이즐넛이군요. 어딜 가나 헤이즐넛, 헤이즐넛...... 두 사람 몫의 샌드위치와 커피를 내려놓고 돌아서는 종업원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집니다.
무작정 차를 달려 이 바닷가에 도착했습니다. 내처 이곳까지 달렸어요. 잘 뚫린 고속도로를 버리고 국도로만 굽이굽이 세 시간 여, 오솔길과 들판을 내다보면서요. 차창을 내려 누그러진 듯한 바람도 빵빵하게 들이면서요.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내 사는 곳에서 비교적 가까운, 물길 열리고 닫히는 제부도쯤을 마음에 두었더랬어요. 그런데 길 위에서 그만 생각이 바뀌어버렸어요. 왕왕 있는 일이지요. 커피를 마시러 들어갔던 카페에서 차가운 맥주를 시키는 경우처럼요. 그럼요. 처음부터 나중까지 한결같기란 어려운 일이고말고요.
변했군요. 몇 해 전 이곳은 물과 하늘과 갯벌뿐이었는데요. 지금은 리조트콘도와 주차장이 턱 버티고 있고, 외지 사람들에게 때 없이 짓밟히고 있습니다. 어디나 그렇지요. 사람의 눈에 띄면 나아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자연의 경우에는 특히요. 더럽혀지고 너덜너덜해지고 마침내 황폐해지는 거, 시간문제입니다.
장담 하나 할까요? 몇 년 후면 이 바닷가도, 단란주점과 노래방과 장삿속뿐인 횟집으로 빼곡 들어차고 말 겁니다. 도회 사람들의 어지러운 발길과 토악질에 신음하며 폐수와 폐기물의 거대한 집하장이 되겠지요.
불과 삼십 분 사이에 파도의 끝단이 두 배는 먼 지점에서 끊어지네요. 썰물 때인 게지요. 그새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연인들,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 친구들, 벌써 낮술에 비틀거리는 취객들. 아이들에게는 탄탄하면서도 부드러운 개흙을 뒤지는 것도 뜻밖의 재미겠지요.
내가 앉아 있는 창 아래로 소녀 둘이 자전거를 끌고 지나갑니다. 아, 저거야말로 진짜 자코메티 풍입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물에서 막 건져낸 미역처럼 싱싱해 보입니다. 저 나이 때에는 나도 곧잘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어요.
샌드위치는 의외로 성가신 데가 있습니다. 한 입 위쪽을 베어 물면 아래로 내용물이 쏙 빠질 것 같거든요. 그래도 뭔가를 입 안에 넣고 우적거리다 보면 삶의 일상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먹는 일이 그래서 중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바다는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햇살도 조금씩 그 환한 기운을 잃어가네요. 작은 기척에도 구멍 속으로 숨어버리는 게들처럼 갑자기 모래펄이 텅 비었습니다. 다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커피 잔도 비웠습니다.
이제 일어서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아니게, 그러나 아주 담담할 수는 없는 애틋함으로 어느 하루 한때를 여기서 이렇게 흘려보냅니다. 손대지 않은 커피와 샌드위치 앞에 당신이 와 앉았더라면 더욱 좋았겠지요.
3
기억하세요?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당신의 자리가 돼 드리리다......'로 시작되던 그 노래. 한때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지금도 술자리 끝에 지인들과 어울려 노래방 같은 델 찾으면 한 사람쯤 마치 세상의 모든 고단한 이들을 제 무릎에 앉혀주기라도 할 듯 두 팔 벌리고 열창하는 그 노래. 기억이 나신다면, 오랜만에 나직나직 흥얼거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요.
'피곤한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당신을 편히 쉬게 하리라. 두 사람이 와도 괜찮소. 세 사람이 와도 괜찮소. 외로움에 지친 모든 사람들, 무더기로 와도 괜찮소......'
자주 지나다니는 모퉁이 길에 시선을 붙드는 풍경이 있습니다. 흑백의 돌로 차곡차곡 채워져 가는 바둑판처럼,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다 보니 날로 지경(地境)이 무색해지는 시의 외곽조차도 하루 다르게 높직높직한 아파트 군(群)이 들어차는 마당에, 저기 저 푸른 잎들 수런거리는 과수원이라니! 그 과수원 옆구리에 곁방살이하듯 오밀조밀 남새들 심어놓은 텃밭이라니!
그런데 진짜 내 눈길을 잡아채는 것은 외양 말끔한 원외연구소의 실험용 과수원이 아닙니다. 호박 덩굴 휘감아 오르는 얼기설기한 철조망 너머, 고추며 들깨며 오이 가지며, 그런 풋풋한 밭작물들을 번성케 한 누군가의 노고나 여백의 공간감 또한 아니에요. 직각으로 휘어지는 그 도로 바깥쪽에는 하나 둘 셋 넷......, 대략 열 개쯤의 의자가 놓여 있습니다. 내 심드렁한 눈길을 잠시나마 지체하게 만드는 것은, 그러니까, 그 의자들입니다.
의자들은 한결같이 낡고, 빛이 바래고, 조금씩은 망가진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디자인도 재질도 제각각이군요. 어느 집에선가 내다버린 것들 가운데에서 아직 쓸만하다 싶은 것을 옮겨놓은 모양입니다. 의자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한 줄로 늘어서 있습니다. 호박 덩굴 휘감아 올라간 철조망과, 기계영농의 티를 너무 내고 있어서 정감이 가지 않는 과수원을 배경으로, 도로를 향한 채.
만약 누군가 그 의자에 앉아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면, 구십 도 각도로 갑자기 꺾어지는 도로의 생김새 때문에 급히 브레이크 페달을 밟을 수밖에 없는 운전자와 눈이 마주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보다 관찰력 있는 운전자라면, 그 급격한 커브 길에서도 한 순간 휘둥그레진 눈으로 흘낏 뒤를 돌아다보게 되겠고요. 정면을 향하고 있는 의자들과 함께, 커다란 손바닥 같은 호박잎들로 뒤덮인 철조망에 야외 미술관의 전시품처럼 띄엄띄엄 걸어놓은 거울액자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니까요.
누가, 그 의자들을 거기에 놓아두었을까요? 누가, 그 의자들만큼이나 흠이 있는 거울들을 거기, 딱 사람 눈높이만 한 위치에 걸어두었을까요? 햇살 속에서도, 장대비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의자들, 거울들...... 그 사물들에게 경이로운 침묵을 부여한 이는 누구일까요?
그 도로를 지나다니는 동안, 나는 한 번도 그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누구인가 거울 앞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의자들과 거울들에서는 사람의 체취가 느껴집니다. 이해(利害) 따위에 매이지 않는 기다림이 느껴지고, 계산하지 않은 배려가 느껴지고, 편협하지 않은 영혼이 느껴집니다.
언젠가는 차를 세우고 당신과 나란히 그 의자에 앉아보아야겠어요. 누군가 우리에게 머물러 쉬어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머물러 쉬어가고 싶었던 것처럼. 그렇게 오도카니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을, 급정거 탓에 위태롭게 쏠리면서도 바삐 내달리는 차량의 꽁무니를, 지켜보아야겠어요.
아무도 앉지 않고,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그 도로의 의자들과 거울들은 이미 하나의 풍경으로 내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바라노니, 삶이여! 의자와 거울이 있는 내 안의 풍경이, 부디 깊은 물 속에 가라앉은 빛처럼 고즈넉하기를......
- <내 영혼이 한 뼘 더 자라던 날> (엠블라, 2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