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가을 서정 속에 '나'를 맡긴다
머니투데이 | 기사입력 2008.11.01 08:41
[머니투데이 민병준여행전문작가][[머니위크]
한국의 걷고 싶은 길/순천 낙안읍성 & 선암사 송광사]
가을이 제법 깊었다. 강원도쪽엔 벌써 낙엽이 뒹굴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을이 가장 늦게까지 서성거리는 남도는 바야흐로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이번 가을엔 남도의 순천 땅으로 내려가 보자. 거기서 가을 나그네가 되어 낙안읍성을 거닐고, 선암사와 송광사에선 늦가을 산사의 정취도 한껏 느껴보자.
호남고속도로 송광사 나들목을 벗어나면 길은 호남정맥 조계산(884m) 기슭의 송광사(松廣寺)로 이어진다. 벚나무의 붉은 이파리가 마중하는 절집으로 들어서면 송광사의 승맥을 이어온 고승들의 숨결이 뜨거운 비림(碑林)이 반긴다. 일주문 돌계단엔 돌사자가 반가사유상처럼 한발을 턱에 고이고 묵상에 잠겨있다. 이어 단풍잎 떠내려가는 계류의 우화각을 건너면 사천왕문. 절에서 국재를 모실 때 손님을 위한 밥을 저장하던 '비사리구시'가 눈길을 끈다. 여기에 4000명 분량의 밥을 담았다 하니 송광사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16분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 송광사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 하나로 꼽히는 송광사는 1200여년 전에 혜린선사가 길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절집이다. 고려 때는 보조국사 지눌이 나라의 지원을 받아 중창한 후 수선사라 고쳐 불렸다가, 당시 한국 선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후 이 절집은 보조국사를 1세로 해서 16분의 국사를 배출해 승보(僧寶)사찰의 명성을 얻으며 한국 불교의 중심 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문화유산도 많아 목조삼존불감, 고려 고종 제서, 국사전의 국보 3점과 대반열반경소, 약사전, 영산전, 십육국사진영 등 수많은 보물들을 둘러보는 재미도 적지 않다.
조계산 너머에 있는 선암사는 봄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절집이다. 이른 봄날 매화, 벚꽃 같은 봄꽃들이 활짝 피면 절집 전체가 한 송이 꽃으로 변한다. 봄이 예쁜 절집은 가을도 아름다운 법이 아닌가.
계곡 물가에 걸린 우아한 승선교(보물 제400호)와 강선루가 조화를 이룬 풍경은 선암사의 걸작품. 이 다리는 속세의 온갖 번뇌와 욕심을 씻고 선계로 가는 성스러운 공간이다. 바람도 없는데 돌다리에 툭, 하고 떨어지는 낙엽은 세속의 욕심도 이렇게 놓으라는 부처의 가르침인가. 아쉽게도 붕괴위험 때문에 통행을 막고 있다.
선암사 해우소는 '볼일' 없어도 한번쯤 들르는 곳. 건축물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깊이(?)에 있어서도 무척 유명하다. 옛날 산 너머 송광사 스님이 솥이 크다며 사세를 자랑하자 선암사 스님이 했다는 대꾸 한 마디. "우리 절 뒷간은 얼마나 깊은지 어제 눈 똥이 아직도 떨어지는 중이라네. 아마 내일 아침녘에야 소리가 들릴 거라네."
선암사에는 800년 된 차밭이 있다. 차맛을 가르는 건 물맛이고, 가장 좋은 물은 차가 자라는 곳에서 나는 샘물이라 했던가. 당연히 선암사에도 차맛에 어울리는 맑고 그윽한 샘물이 샘솟는다. 역시 차나무 뿌리를 훑고 흘러온 샘물은 산사를 비추는 가을 햇살처럼 깊다. 아쉽다면 산사를 벗어나기 전에 작은 연못 앞에 있는 선각당(先覺堂)에 들러 차 한 잔 음미하자. 산사의 늦가을이 따뜻하게 입안에 번질 것이다.
조계산 굴목이재는 조계산 서쪽과 동쪽에 각각 자리하고 있는 송광사와 선암사 두 절집을 이어주는 옛길이다. 선암사~선암굴목이재~송광굴목이재~송광사는 총 6.8km로 걷는 데만 4시간쯤 걸린다. 여기에 선암사와 송광사를 각각 30분씩 둘러본다고 치면 총 5시간쯤 잡아야 한다.
예전에 스님들의 산책 코스였을 이 길은 계곡을 끼며 걷는 맛이 아주 좋다. 길 걷는 것을 즐기는 가족이나 연인들의 도보여행코스로 적당하다. 하지만 승용차를 이용했을 경우에는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오기가 까다로운 게 단점이다.
◆타임머신 타고 떠나는 시간여행
승용차로 송광사와 선암사를 오갈 때 조계산 남쪽을 휘돌아 가면 낙안읍성을 꼭 지나게 된다. 이곳 역시 산책 코스로 빠뜨릴 수 없는 곳이다. 낙안읍성은 풍수로 보면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의 명당. 이는 '옥녀가 장군에게 투구와 떡을 드리려고 화장하기 위해 거울 앞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형국'이다. 낙안읍성 남쪽에 있는 평촌리 평촌못은 옥녀의 거울에 해당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낙안 고을에는 미인들이 여느 지역보다 유난히 많은 것이라고 전해온다.
성안 풍경은 조선시대 바로 그 모습이다. 서로 처마를 잇댄 초가 풍경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초가 사이 돌담엔 누런 호박덩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마당 한쪽의 텃밭엔 암탉 한 마리 햇살 아래 졸고 있다. 파란 하늘을 향해 팔 벌린 감나무 가지엔 붉은 홍시 까치밥으로 남아 있고…. 성벽 너머로는 낙안들판의 황금물결이 펼쳐진다. 추수 끝낸 논도 보인다. 아마 조선의 늦가을 풍경이 이러했을 것이다.
성벽을 내려와 구불구불 돌담 골목길 지나면 주막거리. 정겨운 주막집을 골라 들어선다. 괜히 "주모, 술 한 잔 주쇼" 하며 조선시대 과객 흉내를 내고 싶다. 주안상이 나온다. 막걸리도 좋지만 낙안의 전통주인 사삼주도 괜찮다. 사삼주의 독특한 향을 들이키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부침개 한점 들면 조선시대 나그네가 따로 없다.
성 안에선 11월까지 주말마다 찾아온 길손들을 위한 놀이마당이 펼쳐진다. 가야금병창(토ㆍ일 15:30~16:30), 읍성군악(둘째 넷째주 16:30~17:20), 낙안서당(토ㆍ일 09:00~17:00), 소달구지(일요일 09:00~17:00) 등의 행사가 준비되어 있다. 읍성에서 벌어지는 흥겨운 전통 놀이는 현대화된 공연장에서의 그것과는 비교 못할 감칠맛이 있다. 수문장 교대식(토ㆍ일14:00~16:00)도 볼만하다.
낙안읍성 성벽의 길이는 총 1,410m, 성벽만 한 바퀴 도는 데는 30분 정도 걸린다. 성안 이곳저곳 둘러보는 시간까지 합쳐 1시간 정도면 넉넉하다.
여행정보
숙박 =
낙안읍성 안에는 잔디민박(061-754-6644), 동문고향집(061-754-2550), 처가집(061-754-2968) 등 민박집이 많다. 모두 짚으로 지붕을 올린 초가집이라 옛 시골 정취를 경험할 수 있다.
초가집은 아니지만 성 밖에도 수환이네(061-754-6604), 고향촌(061-754-6730) 등 콘도형 민박집이 여럿 있다. 읍성 주변의 모텔형 숙박업소는 파출소 사거리에 있는 궁전모텔(061-754-6951)이 유일하다.
낙안읍성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낙안민속 자연휴양림(061-754-4400 www.huyang.go.kr)을 이용하는 것도 괜찮다. 휴양관 4만4000원, 야영장 4000원.
별미 =
이순신 장군이 낙안읍성을 방문했을 때 백성들이 대접했다는 팔진미(八珍味)는 낙안의 별미다. 이는 금전산 석이버섯, 백이산 고사리, 오봉산 도라지, 제석산 더덕, 남내리 미나리, 성북리 무, 서내리 녹두, 용추천의 물고기로 요리한 음식이다. 낙안읍성 안에는 낙안 팔진미를 차리는 식당이 여럿 있다. 1인분에 1만원.
낙안읍성 근처엔 보리밥을 전문으로 하는 집이 눈에 많이 띈다. 보리밥 한그릇을 시켜도 반찬 올려놓을 상이 비좁을 정도로 푸짐하다. 고사리, 버섯, 도라지 등 산에서 나는 것은 물론이고, 게장ㆍ갈치젓에 벌교 꼬막 등 해산물도 올라온다. 고향보리밥(061-754-3419)이 잘한다. 1인분 6000원.
교통 =
호남고속도로 송광사 나들목→27번 국도(벌교 방면)→8km→송광사 입구→27번 국도→15km→외서면 소재지→6km→낙안읍성→857 지방도→15km→선암사 입구→4km→호남고속도로 승주 나들목.
※낙안읍성 관리사무소 061-749-3347 www.nagan.or.kr
민병준여행전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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