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토벤 교향곡 9번-합창"- 교향곡 제 9번 라단조 작품 125 합창베토벤의 1809년 스케치 북에는 교향곡 제 9번 제 1악장 제 1주제로의 도입 음형이 이미 적혀 있었답니다.
1812년의 스케치 북에서는 'd단조 교향곡'이라는 글을 찾아볼 수 있답니다.
이어서 1815년 의 노트에는 제 2악장 스케르초의 주제가 적혀 있고, 1817년의 노트에는 현재의 스케르초와 음은 다르지만 동일한 모티브를 사용하는 악보가 나타나며 제 2악장의 일부를 이루는 악상이 적혀 있습니다.
1818년 후반에 사용된 노트에서는 "주님 되시는 하나님이시여!
우리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할렐루야" 라는 가사를 가진 합창을 교향곡 속에 집어 넣으려는 구상이 적혀 있습니다.
1822년 10월 10일, 런던 필아모니 소사이어티로부터 교향곡 위촉장이 왔는데, 이것은 베토벤의 뇌리에서 맴돌던 합창이 붙은 교향곡의 구상을 즉각 실현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그리하여 1823년 말, 혹은 아마도 1824년 초에 이 위대한 교향곡은 완성되었습니다.『Sketch for the 9th symphony』이 작품은 1824년 5월 7일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자신의 서곡과 “장엄미사”와 같은 프로그램으로서 초연되었습니다.『Entry of Beethoven's Baptism in the register of St.Regimus church, Bonn』"많은 저명한 인사들인 청중이 이 교향곡에 대해 큰소리로 외치면서 박수를 보냈다. 베토벤은 그 장면을 보기 위해 돌아서지 않았는데 그것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독창자의 한 사람이 그의 옷자락을 끌어서 박수를 치고 모자를 던지며 손수건을 흔드는 청중들을 보게 하였다...... 그는 청중들에게 돌아서서 인사했다" 타이에르 포르베스(Thayer Forbes)의 말입니다.『Thayer's Life of Beethoven, Part I by Alexander Wheelock Thayer,Elliot Forbes (Editor), Elliot Forber』음악회의 수입은 컸지만 지출하고 난 다음에 남은 것, 즉 베토벤에게 지불된 것은 아주 적었습니다.
베토벤은 자신을 속여서 일을 처리했다고 하여 그의 친구들을 고발하게 됩니다.두 주일 후 반쯤밖에 차지 않은 연주회장에서의 재연은 결손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제 9번 교향곡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죠.
끝악장에서 합창과 독창의 사용은 가장 놀라운 새로운 특징이었습니다.
베토벤이 쉴러(Schiller)의 <환희의 송가>에 음악을 붙이려고 했던 것은 1792년 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 9번 교향곡에 이 가사로 끝악장의 합창을 만들려고 결심한 것은 1823년 가을 경이었는데, 그가 사용할 시의 연을 선책한 점, 즉 기쁨을 통한 인간의 보편적인 형제애와 그리고 영원한 천상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의 그 바탕이라는 그의 두 사상을 강조하기 위해서 두 연을 선택한 것은 베토벤의 윤리적 이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면모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베토벤은 긴 기악적 교향곡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성악을 도입할 경우에 생기는 부조화 때문에 상당히 고심했던것 같습니다. 이 새롭게 제시될 미학적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끝악장에 특이한 형식을 결정하게 되었지요.
짧고 소란스러운 서주:
앞악장들의 주제를 기악적 레시타티브로 훑어 보고 거절함 : 환희의 주제를 암시한 뒤 이를 즐겨 받아들임 : 네 연의 주제를 관현악으로의 제시와 크레센도, 코다 :
다시 소란스러운 불협화음의 시작 마디들 :
"친구들이여, 이러한 곡조를 그만두고 좀 더 즐겁고 기쁜 노래를 부릅시다" 라는 말의 바리톤 레시타티브 : 네 연으로 된 환희의 주제를 합창 및 관현악으로 제시한 뒤 변주(터기 행진곡을 포함), 첫연이 반복되기 이전의 긴 관현악 서주 : 관현악과 합창으로 새 주제 :
두 주제로 만든 2중 푸가 : '하늘에서 내려온 불꽃' 이라는 가사가 더할 나위없이 숭고한 선율에 뒤이어지는 복잡하고 규모가 큰 코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교향곡의 첫 세 악장 역시 비교적 큰 규모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스케르초는 소나타의 한 악장을 하나의 리듬 모티브로 유기화시킨 베토벤의 능력을 보여주는 뛰어난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베토벤이 후대의 교향곡에 끼친 영향은 두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표준적 고전 형식에 의것한 절대음악의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적 형식을 벗어나는 여러가지 형식의 표제음악 인 바, 혁신적 방향인 후자를 다시 둘로 나누어 보면, 하나는 제 6번 “전원”에 의한 표현적 표제음악으로의 발전이고, 나머지 하나는 제 9번 “합창”에 의한 교향곡에의 인성 도입이라는 점입니다. 후자의 뛰어난 예로는 말러의 “천인 교향곡”을 들 수 있습니다.
●“환희의 송가”(The Song Of Joy)
"합창교향곡" 은 베토벤이 54살 때인 1824년에 완성되었지만 이미 20살 무렵에 쉴러의 시 "환희 에 붙여서"를 읽고 감동을 받아 그의 나이 23살 때 스케치북에 메모를 하면서 인류의 위대한 환희의 송가를 하루 빨리 음악 작품으로 만들려고 애썼답니다.
1823년 53살때 영국 런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에서 마침 새로운 교향곡의 청탁을 받게 되었고, 약 30년 동안이나 꿈꾸어 온 작품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1823년 말 (혹은 1824년 초)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베토벤은 젊었을 때 앓기 시작한 귓병으로 전연 들리지 않는 귀머거리가 되어 있었지요. 그는 귓병의 콤플렉스 때문에 빈의 시민들을 불신하고 있어서 이 대곡이 이해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여 베를린에서 연주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뜻이 알려지자, 빈의 음악가, 평론가, 애호가들은 진정서로서 긴 사연의 글월을 그에게 보내어 "합창교향곡"의 첫 공연을 기어이 빈에서 해 주기를 바랄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봉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답니다.
이 진정서에 따라 베토벤은 1824년 5월 7일 케른토르트너 극장에서 발표하기로 하였는데 이 날의 프로그램에는 “헌당식 서곡”과 그의 대표적 걸작이 된 “장엄 미사”중의 키리에, 크레도, 아뉴스 데이의 3장도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베토벤은 지금까지 작품을 처음 발표할 때에는 의례 자신이 지휘해 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귀머거리이면서도 지휘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작곡자 자신이 아무리 자기 작품을 속속들이 외고 있다 하여도 전연 소리를 듣지 못하므로 자연히 템포가 이지러질 것을 걱정한 주최측은 움라우프라는 보조 지휘자를 슬그머니 베토벤 옆에 서게 했습니다.
베토벤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지휘봉을 휘둘렀으나 단원들은 처음에만 그의 지휘를 따랐을 뿐, 자꾸만 오케스트라와 맞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보조 지휘자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 날의 연주회에서는 시간 관계로 연습이 부족했기 때문에 연주가 제대로 되지 않았지요.
그러나 청중이 하도 감동한 나머지 열광적으로 함성을 질러서 도중에 다시 연주하지 않으면 안되었었고 더구나 베토벤은 지휘를 할때 격정적인 부분에서는 하늘을 찌를듯이 두 손을 힘차게 휘둘렀기 때문에 청중이 더욱 열광하였답니다.
"합창교향곡" 이 막 끝나자마자 마치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으나 청중에게 등을 돌리고 있던 베토벤은 허탈한 사람 모양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얼른 눈치챈 알토 독창자인 웅겔이 다가서서 베토벤의 몸을 청중에게 향하게 했습니다.
청중이 더욱 박수 갈채를 보낼 때에야 비로서 베토벤은 머리를 숙여 답례했지요. 이때 그 자리에 있던 부인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Ear Trumpets and spectacles belonging to Beethoven』물론 여성이 남성보다 감정이 더 민감하기 때문에 청중 가운데서 유독 부인들이 눈물을 많이 흘렸겠지만 그 가운데에 혹시 베토벤이 23살때 그의 음악을 듣고 감동하여 장차 위대한 음악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쉴러의 부인 샬로테가 끼어 있었다면 더욱 감격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같이 빈에서는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으나 그 뒤 다른 곳에서 연주했을 때에는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던지 이렇다 할 박수갈채를 받지 못했습니다.
"오직 고뇌에 이김으로써 환희가 오고 외로움 속에 기쁨이 있다"는 베토벤의 강인한 사상이 빈 이외에서는 금방 이해되지 않았지만 연주를 거듭할수록 이 음악이 최대의 걸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오페라 작곡가인 바그너는 이 작품의 해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 쉴러에 대하여.. (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1.10~1805.5.9)
독일의 시인·극작가. 바덴뷔르템베르크주(州)의 마르바흐 출생. 아버지는 외과 의사로 군의관이었으며, 어머니는 조용하고 정숙한 여성이었습니니다.
14세 때 영주(領主)의 명령으로 칼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후에 의학으로 바꾸었으며, 이때부터 시와 희곡을 쓰기 시작하였지요.
엄격한 기숙사생활과 구속받던 젊은 시절에 그는 셰익스피어·레싱·호메로스·괴테 등의 작품을 읽으며 습작을 계속하였습니다.
1780년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슈투트가르트 연대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재학 중에 쓰기 시작한 《군도(群盜):Die R隱ber》를 81년 완성하여, 만하임 극장에서 상연함으로써 커다란 반응을 일으켰고 이는 독일적인 개성 해방의 문학운동인 ‘슈투름 운트 드랑’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으로 영주의 분노를 사게 되어 그는 만하임을 탈출하였습니다.
그 후 가난을 참아가면서 극작에 정진(精進)하여 74년 역사극 《피에스코:Fiesco》와 시민비극 《간계와 사랑:Kabale und Liebe》을 완성하여 상연하게 되었습니다.
1785년부터 2년간은 C.G.쾨르너의 우정으로 드레스덴에서 안주할 수 있었으며, 그의 청년기의 격렬한 정열과 반항심은 점차 누그러져, 장년기의 냉정과 성숙을 얻게 되었습니다.
1787년 당시 문단의 중심지였던 바이마르로 이주하여 J.G.헤르더, C.M.빌란트 등과 친분을 맺게 되어 역사와 그리스 문학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운문사극(韻文史劇)《돈 카를로스:Don Carlos》(1787)와 역사서인《네덜란드 이반사(離反史) Geschichte des Abfalls der vereinigten Niederlande》(1788) 《30년 전쟁사:Geschichte des Dreissigj?rigen Krieges》(9l∼93)를 완성하였습니다.
1789년에는 예나대학의 역사학 객원교수로 취임하였으며, 《30년 전쟁사》는 그의 교수 취임강연에서 취임기념으로 강연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약혼 중이던 샤를로테와 결혼하였으나, 폐결핵으로 고생하였습니다.
그는 덴마크 황태자인 폰 아우구스텐베르크의 원조를 받으면서, 병이 나은 후에 칸트철학을 연구하여 《우미(優美)와 존엄》(1793),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1795), 《소박한 문학과 감상적인 문학에 관해서:》(1796), 《숭고(崇高)에 관해서》(1802)와 같은 미학 논문을 집필하였습니다.
1794년 실러가 기획한 잡지 《Die Horen》에 괴테가 협력함으로써 그 후 그가 죽을 때까지 문학·사상에서 보기 드문 두 사람의 우정이 계속되어 갔습니다.
1797년 편집한 《연간시집(年刊詩集):Musenalmanach》에 괴테와의 공동으로 작시한 단시(短詩) 《크세니엔:Xenien》 414편을 발표하였고 또 독일 고전주의문학의 위대한 두 시인 사이에 오갔던 《괴테·실러 왕복 서한:Briefe zwischen Goethe und Schiller》은 풍요롭고 순진하며 진지한 두 사람의 영혼의 기록이며, 또한 문예와 인생 문제를 둘러싼 두 사람의 대결과 전개의 귀중한 기록이기도 하지요.
실러는 괴테와의 교우를 계기로 다시 그의 본업인 극작에 전념하여 3부작인 《발렌슈타인 Vallenstein》(99)을 완성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투병하면서 창작을 계속하여, 작품마다 새로운 수법을 구사하며 내면적인 자유의 테마를 추구하였으며, 민족극 《빌헬름 텔:Wilhelm Tell》(1804)을 마지막으로 바이마르에서 죽었습니다.
시인으로서의 특색은, 사상시(思想詩)인 《그리스의 신들》, 《이상과 인생:Das Ideal und das Leben》 《예술가:Die K�stler》 등과, 담시(譚詩)인 《잠수자:Der Taucher》, 《장갑:Der Hand schuh》 등과 그리고 이행시(二行詩)인《말:Die Worte 》 《음악:Die Musik》 《친구와 적:Freund und Feind》 등이 있으며, 베토벤 《제9교향곡》의 합창 부분 《환희에 붙여서:An die Freude》의 작시는 유명합니다.
또한 수는 적으나 《범죄자:Del Verbrecher aus verlorener Ehre》(86), 《유령을 본 사람:Der Geisterseher》(89) 등의 소설도 있습니다.
일생에 9편의 완성된 희곡을 집필하였으나, 총괄적으로 구분하면 《돈 카를로스》를 경계로 하여, 그 이전의 작품에는 외적이며 정치적인 자유를 주제로 하여 격렬한 모습을 띠고 있으며, 그 이후의 작품에서는 내적 자유를 추구하여 숭고하고 유구(悠久)한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즉, 《군도》는 격렬한 사회비판과 자유에 대한 동경이 가득 차 있고, 《피에스코》에서는 폭정에 대한 분노와 공화주의로의 갈망이란 형태를 보이고, 또한 《간계와 사랑》은 계급을 초월한 순애가 귀족사회의 음모로 말미암아 패배하는 모습을 묘사하여 독일의 현실을 준엄한 비판으로 비난하였고, 《돈 카를로스》는 개인의 사랑을 초월하여 인류애로 눈을 뜨게 하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발렌슈타인》은 야심의 정열에 사로잡힌 주인공의 죄과와 멸망 속에서 내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테마를, 《마리아 슈투아르트:Maria Stuart》(1800)는 현세의 집착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내면적 투쟁을 겪어 순화되어 가는 과정을, 잔 다르크의 전설을 극화한 《오를레앙의 처녀:Die Jungfrau von Orleans》(1801)는 신탁(神託)과 현세의 사랑의 상극(相克) 속에서 사랑하고 정신적으로 파괴되는 처녀의 영혼의 고뇌를 각각 묘사하고 있습니다.
《메시나의 신부:Die Braut von Messina》(1803)는 그리스 비극에서 합창의 수법과 운명의 관념을 도입하여, 한 처녀를 다같이 사랑하는 형제의 비운의 전말(顚末)을 묘사하였으며,《빌헬름 텔》에서는 스위스를 무대로 소박한 농민과 사냥꾼인 텔을 중심으로, 악덕무도한 지방관(地方官)에 대항하여 조국을 해방시켜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실러는 독일 고전주의문학에서 괴테와 더불어 2대 거성으로 추앙되고 있으며, 괴테와는 대조적인 자질을 가진 국민시인이었던 것입니다.
『쉴러의 초상』
쉴러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하프를 매우 훌륭하게 연주했기 때문에 음악적인 시를 쓸 수도 있었겠지만 피아니스트인 그의 부인 샬로테가 음악에 더욱 조예가 깊어 남편인 쉴러에게 음악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쉴러는 1805년 그의 나이 46살에 짧은 인생을 마쳤으니까 1824년 에 완성된 베토벤의 "합창교향곡" 을 들을 수 없던것이죠.
그의 부인 샬로테는 1793년 베토벤이 자기 남편의 "환희에 붙치다"의 그 긴 시를 모두 작곡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측근들로부터 들었다고 하지만 과연 그로부터 30년 후 "합창교향곡" 이 완성될 때까지 살아 있었는가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질 않습니다.
베토벤은 이 교향곡에서 신의 사랑과 우주와 자연의 사랑, 그리고 인간의 사랑을 노래하면서 "형제인 인류들이여, 서로 끌어 안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특히 에로스가 아닌 이같은 아가페는 성인 공자가 여러가지 사랑 중에서도 우정을 가장 값진 것이라고 말한 것 이상으로 값진 것이 아닐 수 없지요. 시대가 흐를수록 악마화하고 있는 인간에게 주는 베토벤의 진정한 아포리즘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베토벤을 악성이라는 애칭으로 그를 기억하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교향곡 제 9번 "합창"은 성악을 순수한 기악인 교향곡에 처음으로 곁들인 획기적인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시대별로 음악사에 획기적인 반향을 일으킨 음악적 기법을 도입한 예들이 있는데, 베토벤의 이 제 9번 교향곡도 마찬가지랍니다
'인간 악기'인 성악이 어떤 기악보다 더 영적인 것을 느끼게 하지요. 특히 교향곡 9번의 제 4악장은 관현악기에다가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독창자 한 명씩과 역시 4성부의 합창으로 되어 있습니다.
쉴러의 시가 우리에게 이렇듯 찬란한 광채를 느끼게 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일 것입니다.
아마도 인간의 힘으로 이룩한 가장 완전하고도 위대한 음악작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사람마다 제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베토벤의 교향곡 제 9번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조심스럽고도 조금은 담대한 마음으로 감히 이를수 있지 않은지 생각합니다.
제 9번 교향곡에 베토벤이 담아낸 그의 정신세계, 그것과의 순수한 교감과 혼연일체된 그의 음악적 사랑을 토로하는 듯한 높은 열정들이 순수하고도 이상적인 의미를 포괄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미지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듯한 곡의 시작을 비롯하여 쾌활한 스케르초, 천국의 인식과도 같이 평온함을 자아내는 정서로 이어지는 악장들을 거쳐서 거센 폭풍우를 연상시키는 도입부로 시작되는 제 4악장이 얼마간 이어지면 이윽고 바리톤 가수가 낭랑한 목소리로 "벗이여, 이 노래가 아니라 더 좋은 기쁨의 노래를 부르자!" 라고 외치듯이 노래하게 되지요.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합창이 바리톤 독창에 이어서 쉴러의 유명한 환희의 노래를 일제히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네 사람의 독창자도 차례차례로 "모든 사람들이여, 서로 손을 잡고 온누리의 축복을 받자.!"라는 웅대한 사상을 내포하고 가슴을 찌를 둣한 노래를 부릅니다.
이 곡은 네 악장으로 되어 있는데 각 악장 하나하나가 지금까지 없었던 웅대한 스케일을 갖고 있습니다.
"오 벗이여, 이 가락이 아니라 더욱 즐거운 가락 그리고 환희에 넘치는 가락을 함께 부르자"는 가사는 쉴러의 시에 의한 것이 아니고 베토벤 자신이 붙인 것입니다.
이어서 바리톤 독창은 처음에 기악으로 모습을 보였던 레시타티보 가락에 의한 환희의 주제를 노래하지요.
“환희여. 아름다운 주의 빛, 천국에서 온 아가씨여, 정열에 넘치는 우리는 그대의 성전에 들어가리. 그대의 매력의 매력을 가혹한 세상의 모습에 의하여 떨어진 것을 다시 결합시키도다. 그대의 날개에 머물 때 모든 사람들은 형제가 되리.!"
이 노래는 모두 함께 부를 수 있는 16마디로 된 민요풍의 노래입니다. 싹 바뀌어 남성 합창이 코랄풍의 노래를 장주하게 부르고 나면 높은 음의 현과 여성이 등장합니다.
"포옹하라. 만민들이여! 온 세상에 이 키스를 주리. 형제들이여! 푸른 하늘 위에서 사랑하는 주가 꼭 계시리. 땅에 엎드려 비나니, 만물들이여 조물주를 믿는가? 푸른 하늘 위에서 주를 찾으라. 많은 별 위에 그는 꼭 계실 것이다.."
이윽고 혼성 합창으로 '포옹하라'의 선율과 환희의 주제가 얽힌 장려한 이중 푸가가 전개됩니다. 이중 푸가가 귀결부로 들어가면서 다시 기도의 대화가 시작되고.. ... ... 환희의 주제에 의한 변주로 돌아가서 네 명의 독창자와 합창이 "환희의 송가" 첫 구절의 새로운 변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노래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전곡의 코다가 되어 독창과 합창은 포르티시모로 열광적인 환희를 노래합니다.
"품에 안겨라. 만민들이여! 온 세상에 이 키스를 주리. 환희여! 아름다운 주의 빛, 천국에서 온 아기씨들이여. 환희여, 아름다운 주의 빛!"
마지막에 모든 관현악 악기는 합창과 함께 무한한 환희 속에서 화려하게 대곡을 끝맺고 있습니다. 베토벤 자신의 말처럼 고뇌를 돌파하고 환희에 도달한 것입니다.
● 쉴러의 음악시(音樂時)
쉴러의 <환희의 송가>는 1786년 라이프치히의 문학지 [탈리아(Thalia)]에 발표되어 세인들의 호평 속에 곧 널리 퍼졌으며 특히 프리메이슨 비밀결사 회원들 사이에 애송되었습니다.
프리메이슨과 비슷한 성향의 계몽주의자들 또한 <환희의 송가>를 즐겨 불렀으리라 여겨지며, 그렇다면 베토벤 또한 이미 본에서 이 시를 들어 보았을것입니다.
그러나 베토벤이 <환희의 송가>에 곡을 붙일 생각을 한 것은 휠씬 나중의 일로, 젊은 법학 교수 바르톨로메우스 루트비히 피셰니히(Bartholomues Ludwig Fischenich)가 1792년 10월에 예나(피셰니히는 여기서 쉴러와 교유했다.)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베토벤에게 이를 귄유했습니다.
이 해 11월 초 베토벤은 본을 떠났는데, 이듬해 1월 피셰니히는 샤를로트 폰 쉴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토벤이 "쉴러의 <환희의 송가>에다 매 행마다 곡을 붙이게 될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베토벤이 실제로 빈에서 이 일을 하고 있었음은 1803년의 한 편지에서 피아노 반주 붙은 가곡을 언급하는 데서 확인되나, 이 노래는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알 길이 없습니다.
베토벤이 작곡 계획을 곧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여기저기 산재한 초고들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1812년에는 쉴러의 시를 붙인 서곡을 한 편 쓰려다 그만두었고, 같은 1812년, 그러니까 교향곡 제 7번과 제 8번을 쓰는 동안에 라단조 교향곡 두 편을 함께 구상하기까지 했으나 주제의 윤곽조차 잡지 못했습니다.
1815년에는 뒤에 제 9교향곡의 스케르초 주제가 될 부분을 남기고 있습니다.
1817년에는 제 1악장의 윤곽이 드러났으나 다음 해까지도 완성을 보지 못했지요.
1822년 <신포니 알르망드>(끝내 실현은 보지 못했지만)를 구상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1823년, 마침내 마지막 악장을 합창 피날레로 하기로 결정했고, 이후 작곡은 빠른 속도로 진척되어 1824년 2월에는 총보까지 끝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뭏튼 빈에서의 베토벤의 제 9번 교향곡은 성공적으로 초연되었고 그의 생애 가장 힘든 상황에서 가장 멋진 걸작과 감동을 안겨준 유명함으로 그의 모든 9개 교향곡의 진정한 피날레를 빛으로 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Beethoven's grave in Vienna』
● 추천판
역시 대표적인 베토벤의 파퓰러라서 대단히 많은 앨범들이 있습니다.발터, 카라얀, 뵘의 연주... 그리고 셸 지휘판 솔티의 연주가 훌륭합니다. 『번스타인-뉴욕 필하모니, 유진 올만디 지휘판』 『발터-콜롬비아 교향악단, 매즐-클리블랜드 관현악단』 『클라우디오 아바도-베를린 필, 조지 셸-클리블랜드 관현악단』 『라파엘 쿠벨리크-빈필, 존 엘리어트 가디네르-로맨티크 오케스트라, 칼뵘-빈필』 『게오르그 솔티 & 마가렛 힐-시카고 심포니』 ● 10번 심포니의 스케치..● 베토벤 교향곡 전곡 칼럼을 마치며..『테레사와 함께한 베토벤』 고전파의 대가라 불리는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을 기억하실 거예요.그는 다수의 100이라는 단위의 수만큼이나 많은 교향곡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그에겐 베토벤처럼 그렇게 신체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이런 명곡에 대한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이 있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되는군요.. 베토벤의 교향곡이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사랑받는 이유는 여타의 고전 작곡가들과는 달리 음악에 대한 표현과 그 속에 부여하려고 했던 작곡자 자신의 의도와 정신이 베토벤과는 조금이라도 다른 차이점이 있음을 암시하는 커다란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베토벤, 그의 음악을 통해서 특히 그의 교향작품들을 통해서 그를 듣는 청중들 사이에선 어린 사람들에게 마저도 간접적인 격정과 열정적인 인생을 경험해내는 감상 어법을 체험시켜 줍니다.
이것은 그의 위대함을 떠올리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지요.
아마도 베토벤은 천상에서도 환희의 송가를 부르는 영원한 악성으로 기억될겁니다. 여전히 아름답고 웅장하며 장엄하기까지 한 그의 음악들이 바로 우리 곁에 항상 있을테니까요.
베토벤의 9개 교향곡을 통한 음악여행을 이제 마치려고 합니다. 모쪼록 클래식 음악 애호가, 본 칼럼의 회원 여러분!! 베토벤의 4대교향곡 외에 다른 곡들도 유심히 한번쯤 음악가로서 한 인간으로서의 그를 이해하는 재청의 계기를 가지시길 바라구요..
여러분의 생활과 삶이 그의 음악으로 더욱 풍성해 지시길 소망합니다.좀더 시원하고 음악마저도 다르고 신선하게 들리는 10월에 더 좋은 글로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베토벤의 초상화, 환희의 송가 악보..베토벤의 장례행렬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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