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꽃 두 송이를 그녀에게 주었네.
사랑한다 말하고 싶어서.
내 사랑!
그 꽃은 당신과 나의 심장이 될 거요."
-치자꽃 두 송이"쿠바의 이브라힘과 오마라가 부른 볼레로"
지난 겨울은 뜻밖에 추웠습니다.
겨울을 지나면서 직지사에 심은 치자나무 한 그루가 동사했고, 우리 아파트 치자나무잎들은 검버섯이 박힌 채 누렇게 변했습니다.
저런 잎을 달고 어찌 새봄을 맞이하고 꽃을 피울까 걱정했는데, 오월에 접어들자 묵은 잎들이 비처럼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가지 끝마다 새로 난 작은 잎들이 성큼성큼 커지더니 이내 연둣빛으로 나무를 덮어버렸습니다.
유월에 보드라운 연둣빛 잎새를 가진 것은 아마도 늦잠꾸러기 대추나무와 치자나무 밖에 없지 싶습니다.
작은 아이스크림같은 치자 꽃망울에는 일천 개의 사랑과 희망이 녹아있는 것 같습니다.
작년에 비해서 일주일 늦은 6월 12일에 치자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유월 초순의 눅눅한 공기를 일시에 걷어내는 발랄한 햇살이 쏟아지자 기다렸다는 듯 단박에 꽃이 피어난 겁니다.
여섯 장의 순백의 꽃잎이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모습은 고요한 밤하늘에 휘영청 만월이 솟은 것 같습니다.
달콤한 향기를 내뿜으며 신비로운 미소를 짓는 치자꽃을 보면, 그 발 아래 엎드려 경배하고 싶습니다.
"꽃피는 아침에는 절을 하여라 / 피는 꽃을 보고 절을 하여라
걸어가던 모든 길을 멈추고 /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서서
부처님께 절을 하듯 절을 하여라 "
-운주사에서 / 정호승
순백의 꽃잎 가운데 오똑한 연노랑 꽃술은 얼마나 앙증맞은지 모릅니다.
꽃술은 콩알처럼 두 쪽으로 갈라져 어디가 암술인지 수술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치자꽃 한 송이 똑 따서 입 안에 넣으면 마시멜로처럼 사르르 녹아버릴 듯 합니다.
치자꽃은 華而不侈(화이불치)입니다.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습니다.
치자꽃은 周而不比(주이불비)입니다. 두루하되 편가르지 않습니다.
무수한 사막과 바다, 산과 들을 지나서 새삼 발견한 치자꽃이기에 더 사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내 사랑 치자를 만나게 해준 삶이여! 감사합니다!"라고요.
조선시대 풍류객이었던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고아한 것은 매란국죽이요, 요염한 것은 모란, 해당화이고,
청초한 것은 옥잠, 목란, 치자"라고 했습니다.
강희안은 <양화소록>이란 책에서 치자의 네 가지 아름다움에 대해 말했습니다.
"첫째, 꽃빛이 희고
둘째, 향기가 맑고
셋째, 겨울에도 낙엽지지 않고 윤기 나는 싱싱한 푸른 잎
넷째, 황금색 물감으로 쓰이는 열매로, 꽃 중의 가장 고귀한 것"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술잔 같이 생긴 열매가 나무에 달린 것으로 보았다 해서 잔 치(梔)에 나무 목(木)자를 붙여
치자목이라고 합니다. 황금빛 열매가 달리는 꽃잎이 홑잎인 치자 외에 열매가 달리지 않고
꽃잎이 겹으로 된 천엽치자라 불리는 치자도 있습니다.
작년에 치자나무 몇 그루를 주문했더니 홑치자가 아니라 겹치자가 배달되었습니다.
내심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릅니다. 치자나무라 하면 당연히 열매가 달리는 홑치자인 줄 알았거
든요. 나의 실망을 모르는 척 겹치자는 우리 집에 오자마자 고 작은 몸매에 보란 듯이 아홉 개의 꽃을 야무지게 피웠습니다.
달콤한 향기는 여전하고 작은 백장미와 같은 모양이지만 더 소담스럽고 정갈한 꽃잎들입니다.
연화문처럼 둘러선 여섯 장의 꽃잎 위에 소복소복 피어난 새하얀 꽃잎은 근접할 수 없는 고결함과 순수를 지녔습니다.
나의 지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겹치자가 홑치자보다 훨씬 예뻐요. 왜냐면 첫사랑처럼 홑치자 보다 먼저 본 꽃이니까요."
"겹꽃보다 홑꽃을 좋아하지만 치자만은 예외야. 나는 겹치자가 홑치자 보다 더 좋아."
"홑치자가 진짜 치자지. 겹치자는 열매도 안달리잖아."
이제 저도 슬그머니 첫사랑 홑치자에서 마음이 겹치자 쪽으로 슬금슬금 옮아갑니다.
춤추듯 경쾌한 꽃잎과 황금빛 열매를 보면 홑치자가 좋고 탐스럽고 고결한 꽃잎을 보면 겹치자가
좋습니다. 이제 황희 정승처럼 "겹치자도 좋고 홑치자도 좋다."라고 말하렵니다.
여건이 허락하면 모두 뜰에 심어서 아침 저녁으로 '내 사랑, 치자야!'라고 부르면서 함께 늙어가고 싶습니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건너온 꽃을 피우기 위해서 오늘도 장맛비가 내린다고 합니다.
칠월에 피어날 꽃들과 더불어 행복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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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겅퀴--민들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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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리--공담님
석잠풀--파란하늘님
금강애기나리--째즈님
사랑과 희망이 가득 담긴 치자꽃 두 송이를 바칩니다.
한 송이는 병마와 싸우시는 바람재 회장님의 쾌차를 위해서,
또 한 송이는 바람재 꽃님들의 건강을 위해서!
2008년 칠월 초하루 바람재 운영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