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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風景

[정미경] 밤이여, 나뉘어라

by 진 란 2007. 9. 18.

《제 30회 이상문학상 대상 작품》



밤이여, 나뉘어라 


정미경



―오랜 세월 머나먼 독일 땅에서 평생을 살다간 윤이상, 그는 처절한 조국상실의

심정을, 북구에 망명중이던 유대시인 넬리 작스의 시 《밤이여, 나뉘어라》에 곡

을 붙여, 불멸의 음악사극으로 남겼다. 내가 이 시극에 집착하는 까닭은, 그 음울

한 외침과도 같은 발성과, 신경을 긁어대는 듯한 불협화음에서, 이 작중인물들이

내면에서 자아내는 절규를 들었기 때문이다.




부우우우.

뱃고동 소리는 미세한 입자로 흩어지며 아침 안개와 섞인다. 습기를 머금어 비릿해진 그 소리가 살갗으로 스민다. 들숨을 쉴 때마다 속이 울렁거린다.

물 위의 호텔 같은 거대한 여객선이 천천히 선회하자. 선창 밖으로 파노라마 사진처럼 예테보리 해안의 풍경이 길게 펼쳐진다. 어젯밤 떠나 온 북독일의 키일로 되돌아온 건가 싶을 만큼 두 항구의 모습은 닮았다. 거대한 화물선과 대륙간 여객선, 파도에 흔들리는 작은 어선들, 무채색의 하역창고들부터 대기의 빛깔까지도. 이른 아침의 텅 비어 있던 선착장이, 배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차츰 메워진다. 해협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기온은 느낄 수 있을 만큼 낮아졌다. 어깨에 들렀던 스웨터를 서둘러 껴입는다. 뜨거운 차를 마시고 싶다.


객실 아래의 차량 칸에서 꾸역꾸역 밀려 나오는 차들과 사람들로 뒤엉킨 부두를 빠져나오면서 혹시나 싶어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아직 P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부두 입구의 쇼핑몰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보자 했으니 그곳에 가서 기다리면 될 것이다. 쇼핑몰 입구는 열려 있는데 아직 상가들은 문을 열지 않았다. 긴 복도의 끝으로 주황색 불빛이 은성한 카페가 나타난다. 막 문을 열었는지, 노천으로 연결된 문이 활짝 열려 있고, 의자를 들고 나가 배열을 하느라 어수선하다. 차갑고 딱딱한 의자에 엉덩이를 대고서야 멍한 기운이 좀 가신다.

여행지의 기차역이나 항구 주위의 식당은 예테보리나 상해나 순천이나, 비슷하다. 자기부상열차의 식당 칸에 앉은 듯 지상에서 약간 떠 있는 듯한 느낌. 다시 출발하기 위해 불안정한 위장 속으로 무언가를 구겨 넣어야 하는, 존재의 동물성이 슬프게 느껴지는 공간일 뿐 따스함도 아늑함도 없다. 어떤 메뉴도 포만감을 주지 못하며, 그러니 어서 떠나라고 등을 미는 기운만이 실내에 가득하다. 화장기 하나 없는 웨이트리스가 건네준 샌드위치는 딱딱하고 요플레는 차갑다. 각성이 필요하지 않아도 커피를 들이켤 수밖에 없는 모래 같은 끼니다. 몸은, 여전히 배 위에 실린 듯 느리게 흔들리는 감각을 털지 못한다. 먼 곳에서 지진이 일어난 듯 바닥이 울렁거리는 느낌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내 가슴속일 것이다.


P는 굳이 나오겠다고 했다. 바쁠 텐데, 라고 짐짓 말했지만 P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함부르크에서의 시사회 일정 끝에 굳이 오슬로를 연결한 것도 P가 아니었다면 잡지 않았을 스케줄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함부르크까지 온 것부터가 P를 한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여행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9년? 10년?

그러니 내가 미친놈 소리 들어가며 전공을 버리고 영화판으로 뛰어든 것도 십 년이 가까워온다. 어려운 순간들이 많았지만, 불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든 영화가 다섯 편이 넘어가면서 평론가들은 내게 작가주의, 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언젠가부터 새 영화가 나올 때마다 매스컴에선 호의적이거나 악의적이거나 어쨌든 제법 큰 박스 기사로 다루어주었다. 요즘은 영화제라도 참석하면 내 필모그래피를 줄줄 외우며, 신이시여, 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팬을 만나는 일도 이젠 드물지 않다. 국내 관객 수는 늘 어느 선을 넘지 못하지만 그건 내 능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애초에 내 지향점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만큼 나는 조금은 오만해져 있다. 유렵에서의 내 평판은 꽤 괜찮다. 남유럽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처음 초청되었을 때, 잠들지 못하고 설레던 밤에도, 나는 P를 생각하고 있었다. 과장되긴 했지만 출발하기 전 어는 국내 신문은, 유럽 현지에서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아무개 감독의 유럽문화 순방, 이라는 특집기사를 내기도 했다. 함부르크의 시사회 초청장을 받는 순간, 나는, 이번 여행의 진짜 목적은 P를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P를 향한 신의 특별한 은총을 지켜보며, 내 청년기는 지나갔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르? P와 난 그것과도 달랐다. 불우한 현실을 살아야했던 모차르트와 달리 P는 현세에서 이미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을 누리고 있었다. 여행가방을 싸며 나는 오직 P에게 보여주기 위해 기사 스크랩북을 챙겼다.

커피를 리필하러 가자, 북구의 처녀는 갓 뽑은 커피를 가득 채워주며 당신, 배를 타고 왔군요, 라며 상냥하게 웃는다. 블론드보다 더 밝은 머리칼. 음모도 저 색깔일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욕정과는 상관이 없다. 지금 내 마음 속에서 자글거리는 초조함도 연거푸 마신 진한 커피 외엔 아무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고 싶다.

복도를 달려오는 P의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손을 먼저 잡고 그리고 끌어안았다. 그도 나도, 오랜만이다. 따위의 말은 하지 않는다. 짐을 하나씩 나누어 들고 밖으로 나오니 팔월의 햇살이 눈부시다. 차는? 하며 두리번거리자, 바로 앞에 세워진 잘못 말린 바가지 엎어 놓은 것 같은 시트로엥의 문을 연다.

“너, 여전하구나. 이건 뭐야. 최신 유행의 그래피티야?”

P는 예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살짝 짓는다. 포릇P를 사도 색깔별로 살 수 있는 녀석이,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설치예술처럼 보이는 경차라니. 모든 걸 다 가져본 자의, 제겐 너무 쉬운 생에 대한 희롱일까. 그래도 좀 심하다. 조수석 바닥엔 동전도 빠질 만한 구멍이 몇 뚫려 도로가 다 보일 지경이다.

“시사회는 어때?”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할까, 실마리를 찾고 있는데, P는 바로 어제의 일을 묻는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십년의 세월을 더듬으려면, 이렇게 거꾸로 시작하는 게 빠르고 정확하게 길을 찾는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음. 성황이었어. 변방에서 온 예술가를, 우리라면 제3세계 작가를 이렇게 대접해 줄까 생각이 들 만큼 진지하게 접근하더라.”

“그 이상은 아니지. 오래 살수록 느끼게 되는데, 그뿐이야. 결코 진정으로 받아들이진 않는다는 거야.”

“그럴까?”

“하긴, 영화감독도 괜찮은 직업이라고 봐. 영화를 만드는 동안은 자기가 신인 줄 착각할 수 있잖아.”

이게 P지. P는 여전하다. 그의 몇 마디가, 함부르크에서의 며칠 동안 내가 빠져 있던 들뜬 기분에서 바로 깨어나게 한단. 내가 알고 싶은 건 P의 근황이다.

“요즘도 바빠?”

“늘 그래.”

P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변함없는 삶의 성취가 지루한 듯. 시가지를 벗어나기 전 P는 차를 세우더니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길가의 마켓으로 들어간다. 도심이라기엔 행인이 거의 없어 커다란 풍경화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이 큰 도시 인구가 오십만이 안 되다니 길을 가다 사람을 만나면 거의 반가울 지경이기도 하겠다. P가 커다란 비닐 쇼핑백 두 개를 들고 나와 차 트렁크에 싣는다. 부피에 비해 꽤 무건운지 비닐이 축 처져 터질 듯 아슬아슬해 보인다.

“여기까지가 스웨덴이야.”

국경의 흔적만 남은 초소를 지나자 노르웨이였다. P의 집은 북쪽으로 한 시간 반쯤 가야 한단다. LA에서 잘나가던 외과의였던 P가왜 이곳으로 옮겨왔는지, 그리고 왜 현장을 그만두고 연구의로 들어앉았는지, 지난번 통화에서 P는 얘기하지 않았다.

“요즘 넌 뭐하니?”

“나? ……면역학 쪽인데, 성과가 나오면 획기적인 게 될 거야.”

P의 말투는, 이제 획기적인 성과도 지겹다는 듯, 심상하다.

“면역 쪽이면, 생화학에 가깝잖아. 넌 노가다 스타일 아니냐? 연구실은 갑갑할 텐데. 루프스 치료나 새로운 바이러스?”

“그런 재미없는 거 말고, 들어볼래? 이건, 영혼의 면역에 관한 거야.”

영혼의 면역이라. 둘이서 같은 대학 의대에서 공부했고, 지금도 가정의학과 정도는 볼 수 있는 나지만 영혼의 면역이란 얘기는 생소하다. 십 년 사이 의학의 영역은 또 그렇게 확장되었단 말인가, 아니면 정신과 영역을 얘기하는 걸까. P는 약간 뜸을 들이며 컵 홀더의 볼빅을 집어 한 모금 마시는데, 휘발성의 향이 코끝을 스친다. 병속의 물은 모르께한 색깔을 띠고 있다.

“기억에 대한 면역이라고나 할까. 예컨대 면역이란 게 뭐니. 한 번 앓은 질병에 대한 육체의 기억이라고 얘기할 수 있잖아. 홍역이나 수두를 한 번 앓으면 평생 다시는 앓지 않는 것처럼, 약물로 뇌의 특정 부분에 있는 기억 메커니즘을 해제할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야.”

“이론은 알겠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그 특정한 기억이 뭔데?”

“사랑, 이야.”

나는, 농담이냐고 묻고 싶은 걸 참는다. 하긴, 내가 의학 공부를 할 무렵에, 줄기세포로 새 장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얘기를 누가 했다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가능할까?”

“모든 건 상상력의 문제지. 나라면, 가능하다고 봐.”

P는, 만나자마자 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듣고 있는 사이, 그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상상력에 관한 한 P를 대적할 인간은 없을 것이니. 오래전, 상상력 따위는 손톱만큼도 허용될 것 같지 않은 외과수술실에서조차 늘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한 놈이니까. 개복수술 후 환자에게 위급한 불명 열이라도 발생하면, 무수히 많은 처치방법 중 두세 개를 조합해서 시술하는 그의 감각은 거의 환상적이었다. 급박한 순간일수록 P는 냉정해졌고 칼끝 같은 그 긴장의 순간을 매번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외과수술 시 그의 바느질은 도무지 흠잡을 데 없는 수준을 지나, 환자가 원한다면 오장육부 어느 곳에라도 데이지꽃이나 장미꽃을 수놓아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수술실에서 노교수들이 뒷마무리를 맡기는 유일한 레지였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십이지장 성형은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는 P에게, 당시 상영하던 영화에서 따온 별명을 붙여준 건 나였다. 코리언 퀼트, 라고.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 큐피드의 화살도 갖지 못했던 사랑의 동시성과 동분량, 그리고 지속성. 뇌파에 작용하는 약의 효능에 의해 오직 그 한 알의 약을 나누어 복용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약. 원한다면 방사성 동위원소의 반감기만큼이나 오래 사랑할 수 있는 약. 사랑에서 비극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냐? 결국 사랑의 비동시성이야. 한 사람은 아직 뜨거운데 한 사람은 오래전에 불에서 내려놓은 냄비처럼 싸늘한 거지. 아스피린과 페니실린, 그리고 비아그라가 인류가 만들어낸 삼대 신약으로 꼽히지만, 이 약은 그것들을 능가하는 폭풍을 일으킬 거야. 지난 세기부터 인간을 위로해 왔던 비아그라나 보톡스 따위 해피 드러그의 결정판이라고나 할까.”

P의 프로필은, 진지하다.

“혈류량의 변화라는 육체적 메커니즘에만 작용했던 비아그라 유의 약과는 차원이 다른 거지. 뇌의 특정 부위에 작용해서 몸과 정신을 동시에 조절할 수 있는 이 약은 과학과 영혼이 상호보완적으로 결합하는 획기적인 신약이 될 거라고 봐. 프로젝트 이름은, 러브피아.”

러브피아.

P, 답지 않다. 누가 들어도 러브와 유토피아라는 단어의 조잡한 합성에 불과한 그 단어는, 편의점에서 제목만 읽어도 내용물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콘돔 상표명처럼 들린다.

“용법은 매우 간단해. 두 가지 색으로 나뉜 타원형 알약을 쪼개 두 사람이 나눠먹는 거야. 10초면 물속에서 완전 분해되는 발포정 방식이지. 어떤 부작용도, 습관성도 없어. 당뇨 혹은 고혈압은 물론이고 암 환자조차 현재 복용하고 있는 약과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어. 말기 암 환자들은 지상의 삶을 마감하기 전 마지막 하루하루를 벅찬 사랑의 광휘 속에서 마무리할 수 있게 될 거야. 모르핀보다 강력한 진통 효과도 덤으로 얻을 수 있을 테고. 흡수기제는 알코올과 비슷해서 약효의 발생 시간은 놀랍도록 짧아. 식도에서부터 흡수되기 시작하면서 효력이 발생하는데 특별히 예민한 체질은 발포 과정에서 생기는 가스를 호흡하면서부터 효과를 느낄 수도 있어.”

“이를테면?”

“상대방의 모든 게 사랑스러워지기 시작하지. 암사슴 같은 눈빛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껌딱지 같은 가슴도 너무도 앙증맞아 보여서 볼 때마다 깨물어주지 않을 수가 없을 거야. 젖꼭지가 피로 물드는 게 몇 번이 될지 몰라. 발바닥에 있는 티눈 자국이 사랑스러워 늘 얼굴을 발바닥으로 한 번만 밟아달라고 애원하게 되겠지. 그녀에게 흰머리가 생긴다면 미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녀의 땀을 핥으면서 왜 사람들이 달콤함이라는 단순함에 미혹되어 짠맛이 주는 심오한 미각적 황홀을 놓치는가 안타까워지겠지. 그녀의 명랑한 방귀 소리는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 될 것이고 다섯 가지 영양소가 발효된 그 냄새는 인간이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하는 철학적 깨우침까지 덤으로 주게 될 거야.”

“누가 그 약을 사먹을까?”

“열정적이고 억제할 수 없으며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사랑, 네가 아니면 차라리 죽겠다는 헌신의 언약이 조금씩 희미해지다가 어느 순간 냉랭해지는, 반감기가 서로 다른 사랑 때문에 아파본 사람들은 이 약의 출현에 열광할 거야.”

차는 북쪽을 향해 수직 방향으로 올라가는 것 같다. 기온이 조금씩 내려가며, 이끼류의 식물이 들판을 뒤덮고 있는 풍경이 나타난다. 공기는 투명하다 못해 유리로 만든 것처럼 단단해 보인다. P의 얘기는 풍경만큼이나 낯설고 환상적이다.

“사랑의 상실이 질병이라고 생각하니?”

“글쎄, 의사들은 저희들이 고칠 수 있는 건 병이라 부르고 못 고치는 건 본성으로 분류해 버리지. 이를테면 외로움이나 질투, 슬픔 같은 건 병이라고 부르질 않잖아. 수면제가 나오기 전엔 그냥 잠이 안 오는 것이었지 불면증은 아니었어. 프로작이 나오면서 우울함은 우울증이 되었잖아. 이 약이 완성되면 열정의 소멸은 질병이 될 거야.”

긴 열변 끝에 목이 마른 듯 P는 볼빅을 집어서 몇 모금 마신다.

이 프로젝트는 어디까지 진행되어 있는 걸까.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건, P의 꿈이 하나도 남김없이 이루어지는 걸 옆에서 지켜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에 불가능이란 없었다. 신의 특별한 은총을 받는 자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똑같은 분량만큼의 질시를 받게 되어 있지만, P에겐 그를 향한 은총이 당연해 보이도록 하는 재능까지도 함께였다.


P와 처음 한 반이 된 건 고3 때지만, 그는 이미 걸어 다니는 신화였다. 새로 배정받은 고3 교실에 들어서면서 P가 앉아 있는 걸 본 순간, 제일 처음 스친 건 내가 이제 일등을 한 번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쉬는 시간에 P가 참고서 따위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집안이 한없이 가난하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에겐 눈을 씻고 찾아봐도 빈한함의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형편없이 구겨진 티셔츠도 P가 걸치면 최신 유행의 빈티지룩으로 보였다. 수석 합격자들이 학교 수업만 들었고 잠은 충분히, 운운 하면 사람들은 거짓말이라 치부해 버리지만, 나는 P를 보며 세상엔 그런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P를 볼 때마다 박탈감과 매혹을 동시에 느꼈다. 사타구니에 습진이 생기도록 책상에 앉아서 여름방학을 보냈지만, 2학기 모의고사에서 나는 여전히 2등이었다. 같이 지망한 의대에 P는 수석으로 합격을 했고, 몇 등인지는 모르지만 나도 합격을 했다. 내겐 과분한 결과였다. 어쩌면 한 번이라도 P를 이겨보려던 나의 눈물겨운 노력이 가져다준 열매였을 것이다.

대체로 모교에 남으려면 가문과 재산과 실력과 천운을 동시에 겸비해야 한다는 전설이 있지만, P가 대학병원에 남을 것을 의심하는 친구들은 없었다. 그런 P가 논문 발표장에서 취한 태도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분분했다. 발표를 앞두고는 지독한 긴장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건 기본이고, 발표 후에 의도적으로 기를 죽이려는 기이한 질문이라도 몇 가지 받으면 한겨울에도 땀이 속옷을 흠뻑 적시는 게 발표장 분위기였다. 그런 심사 장소에, P는, 칼라도 없는 티셔츠에 구겨진 면바지를 입고 앞에 나갔다. 빈손이었다. 아무런 준비물도 없이 서 있는 그를 보자니 내 등에 땀이 다 흘렀다. 누가 봐도 방약무인이었지만, 그의 논문 발표는 간결했고 핵심을 정확하게 드러냈다. 무엇보다도 기존 이론들의 짜깁기가 아니라 탁월한 문장으로 씌어진 의학 논문이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명백히 오만했고, 그 오만은 눈부셨다. 그 오만함이 끝내는 나를 비참하게 했다는 것도 나는 아직 기억한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날의 평가는 채점 교수에 따라 매우 기복이 심했다 한다. 심사위원 중 누군가 그의 지나친 오만함을 사유로 격렬한 반대를 했고, 그 자신의 반대를 관철시키기 위해 사표까지 첨부했다 한다. 친구들의 분석대로, 아카데미즘의 모독에 대한 분노였든, 그의 자리를 노렸던 누군가의 막판 메치기였든, 그는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P는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 같이 있었지만 끝내 후회도 원망도 읽을 수 없었다. 그가 없는 빈자리에서 나는 내게 질문을 했다. 의사로 사는 것이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길이었나. 이 일이 너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나.

내게 P는 라이벌이었을까. 그러지 못했다. 라이벌이란, 강을 사이에 두고 강병의 양안을 달리는 자, 에서 어원을 가져왔다 했던가. 서로의 모습을 곁눈질하며, 터질 듯한 심장과 경련을 일으키는 다리를 질질 끌고라도 기어이 달리게 하는 자. 그러나 나는 한 번도 P와 나란히 달려보지 못했다. P의 위에서 늘 숨이 찼다. 강 저쪽 아득한 앞에서나마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바로 길을 잃었다. 그가 사라졌을 때의 좌절이 그가 있을 때의 좌절보다 크게 다가온 것은 예기치 못한 감정이었다. P는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이었고, 보이긴 하지만 거리를 좁힐 수 없는 무지개였다. 이즈음도 가끔 꿈을 꾼다. 안개 짙은 강변, 푸르스름한 한개 저편 강가에 차갑고도 단정한 프로필로 달려가는 한 청년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결코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미국으로 가서도 P의 소문은 늘 실시간으로 한국으로 날아와 떠돌았다. 그가 서부 최고의 의대에 들어간 것도, 거기서 확고한 터를 잡은 것도, 태평양의 파도가 정원의 가장자리를 어루만지는 저택을 산 것도, 오래지 않아 외과 팀의 캡이 된 소식도, 우리들에겐 그리 놀랍지 않았다. 그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가 떠난 후로 머리 속에서의 그에 대한 의식의 부피는 더 크고 더 생생하게 부풀어 올랐다. 나는 그를 떠나보내지 못했다.

나는 의사의 길을 포기했다. 인체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대신 영혼의 내부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쪽을 선택했다. P야, 네가 바람 부는 강변을 달리겠다 하면 나는 길 없는 들판을 달려보겠다. 그렇게 멀리 있는 P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강은 계속 흘러왔다. 언젠가는, 너는 할 수 없었지만 내가 해낸 것을 그 앞에 내밀고 싶었다. 어느 날, P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북구로 갔다는 얘기를 듣기 전까지 나는 P의 일거수일투족까지는 아니어도 그의 좌표를 늘 확인하고 있었다.  그 이후의 소식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지만, 같은 시기에 공부했던 친구들을 가끔 만나면, 언젠가는 P가 놀라운 프로젝트를 들고 나와 세상을 뒤흔들 날이 있을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러브피아라. 너는 또 어디까지 달려와 있는가. 손을 뻗으면 얼굴을 만질 수 있는 곳에 앉아 있는 너는, 또 얼마나 앞으로 날아가 있는가.




                               *

“거의 다 왔어.”

북쪽으로 하염없이 올라가던 차는 이제 큰 길을 벗어나 들판 사이로 들어간다. 마을 하나에 집 한 채가 있는 형국이다.

M, 은 어떻게 변했을까. 하긴 30대는 인간의 외형이 가장 느리게 변하는 시기 같다. 내면의 격렬한 변화에 비한다면. 오슬로를 행선지에 넣었을 때 나는 P와의 만남만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윤기 흐르는 암갈색 말 몇 마리가 한가로이 놀고 있는 목초지를 지나 경사진 길을 올라가자 붉은 지붕의 집이 하나 나타나다. 조촐하고 아담한 게 농가 주택처럼 보인다. 천장만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오자 작 익은 밀빛 털의 덩치 큰 개 한 마리가 줄레줄레 달려와 짖지도 않고 P의 다리에 코를 부빈다.

오래도록 손질을 하지 않은 듯 뜰은 무척 황량하다. 지난해의 넝쿨식물 줄기가 노랗게 마른 채 뒤엉켜 있는 위로 새 넝쿨이 벋어 있다. 손톱만 한 보랏빛 꽃들이 마디마디 피어올랐다. 마당가엔 잘린 통나무 더미가 녹슨 듯 붉은빛을 흘리며 쌓여 있다. 전지를 하지 않아 함부로 벋친 나무들이 집에 그늘을 드리웠고 밟는 사람이 없어서인 듯 집까지 이어지는 좁은 길 외에는 샛노란 야생화가 지천이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공기가 흘러들어 오는 길이 싸하게 느껴진다. 대기는 시리도록 투명하다. 가장자리의 사과나무엔 조막만 한 사과가 붉게 익어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달려 있다. 초현실주의 화풍의 그림 같은 풍경 앞에서 나는 잠시 말을 잃는다. 황량하면서 또 지독하게 아름다운 뜰이다. 내겐 그렇게 보인다. 어쩌면, 그가 가진 모든 것에 대해 나는 그렇게 받아들여 왔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대로, 추한 것은 추한 그대로, P의 아우라 아래서는 모든 것이 경와를 본질로 하는 오만한 존재감을 획득하곤 했다. 거친 칼맛마저 숭고한 고통으로 보이는 목판의 이콘처럼. 

가방을 들어내고 트렁크를 닫으며 P는 날 바라본다.

“와이프에겐 말하지 마.”

“뭘?”

“아까 그 얘기. 이건, 다국적 제약사와 국경 없이 일하는 몇몇 연구진의 극비 프로젝트야. 길게 봐야 하는 연구이기도 하고.”

“그러지.”

대답했지만, M이 그 내용을 들었다 한들 이런 곳에 살면서 누구에게 얘길할 것인가. 황량한 뜰에 서서 그렇게 주고받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M의 얼굴이 나타난다. 언 몸을 감자기 불 앞에 들이댄 듯 나는 좀 일렁인다.

“오랜만이에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에 만난 걸 누가 모른다고 이런 인사밖에 할 수 없는 건지. 뜰에 선 채로 우리는, 서울에서 여기까지의 이동 경로와, 지금 서울의 더위가 얼마나 지독한지와, 오슬로에서의 일정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서울의 더러운 공기와 시도 때도 없는 교통체증에 대해 얘기할 때 M의 눈이 아련하게 가늘어지더니, 탄식하듯 내뱉는다. 난, 그 탁하고 걸쭉한 공기가 그리워, 한 번만 마셔봤으면 좋겠어. 우리는 오랜만에 들은 농담이라는 듯 하하, 과장되게 웃었다. M은 변하지 않았고, 그리고 많이 달라졌다. 변하지 않은 부분은 알겠는데 변한 부분이 어딘지는 알 수가 없다. 말이 끊어지는 짧은 틈새로 절대적인 고요가 밀려든다.


실내는 매우 간결하다. 통나무 민박집처럼, 작은 부엌과 긴 원목식탁이 전부다. 식탁 위엔 식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밥을 먹으러 그 먼 길을 달려온 것처럼 우리는 먼저 식탁에 앉았다. 된장찌개와 가지구이, 오이무침, 샐러드. 식탁은 간소하기 짝이 없다.

“야, 너 이런 데서 사는구나. 천국이 따로 없네.”

너무 조촐한 식탁에 내가 오히려 창밖을 내다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M이 밥을 푸는 사이 P는 바깥으로 나가더니 와인을 한 병 들고 들어온다. M이 그런 P를 쳐다보며 지나가듯 묻는다.

“낮술을?”

“먼 곳에서 친구가 왔는데……. 얘가 사온 거야.”

나는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다. 참 그렇다. 빈손으로 오다니, 뭐에 정신이 팔렸는지.

어묵과 감자만 넣고 끓인 된장찌개는 맛있었다. 여긴, 한식 재료를 구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하며 M은 내내 미안해한다. P는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와인만 마시고 있다. 밥을 먹고 나서 M이 방에 들어가며 P에게, 나 좀 봐요, 한다. P는 들어가며 방문을 닫는다.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는 M의 목소리가 조금 높고 빠르게 이어진다. P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무슨 일일까. 꽤 오래 나오지 않는다. 십 년만에 만난 친구 옆에서 부부싸움을 하진 않을 텐데. 방문을 똑똑 두드리고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방문을 열어본다. 왜 그래? 눙치듯 묻는 내 쪽으로 M이 고개를 돌려, 잠시만 나가 있을래요? 이건, 우리 부부 사이의 일이라. 웃지도 않고 그런다. 나는 좀 머쓱해져서 문을 닫고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본다. 뒤따르듯 방에서 나온 둘의 표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또 태연하다.


M이 내가 묵을 방을 보여준다며 좁은 계단을 앞서 올라간다. 다락처럼 경사진 천장 아래 일인용 침대 위의 이부자리가 새로 준비한 듯 정갈하다. 오래 비워놓은 곳인 듯 묵은 곡식창고에서 나는 듯한 냄새가 난다. 귀찮게 한 건 아닐까, 싶다.

“오슬로에서 묵으면 되는데.”

“그럴 필요가 뭐가 있어요. 저이도 외롭고, 방도 있는데.”

“말 놓지.”

그 말에 M은 날 빤히 쳐다본다. M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알던 M, 몰려다니며 팥빙수를 같이 먹고 영화를 같이 보러 다녔던 M은 아니다. 말 놓으라는 얘기 말고, 만나면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았는데.

“이 마을 이름이 뭐지?”

“운자 크레보.”

“……운자 크레보. 천국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M이 갑자기 돌을 던지듯 외친다.

“천국? 난, 서울이 그리워. 돌아가고 싶어.”

아까 마당에서는 더러운 공기마저 그립다는 말에 웃었지만, 반복되는 그 말은 암호처럼 들린다. 누군가가 해독해 주기를 바라며 허공으로 띄우는 암호. 그러나 암호를 읽어내기엔 우리는 너무 오래, 너무 먼 곳에 떨어져 지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창밖을 내다본다. 오슬로의 호텔에서 묵는 게 더 나았을까. 나무 덧창이 달린 창밖으로 보이는 호수의 물빛이 푸르고 차갑다.

“호수가 옆이구나.”

M이 가늘게 한숨을 쉰다.

“협만이야. 나중에 내려가 봐. 여기 사람들은 곧잘 수영도 하던데, 내겐 저 물이 너무 차가워.”

M이 나가고 나서 옷을 갈아입고 내려가니 P가 마당에서 따왔다며, 빨갛게 익은 사과 접시를 밀어준다.

“껍질째 먹어. 필름 가져왔니? 같이 보자. 내일은 난 연구소 때문에 아무래도 같이 못 갈 것 같다. 저 사람하고 둘이 다녀와.”

“그러냐?”

담담히 대답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매우 실망스러웠다. 나는 내일 P와 시사회에 같이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 작품을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진 곳에서 P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의 것보단 작지만, 갈채와 영광 속에 서 있는 나를 보여주고도 싶었다.

메이킹 필름을 먼저 넣었다. 카메라를 든 누군가가 웃기하도 한 듯 화면은 흔들리며 시작된다. 촬영 현장의 어지러운 풍경들, 반바지를 입은 나. 모자를 쓴 나. 스태프에게 지시를 내리고 어딘가로 달려가는 나.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거품이 이는 맥주잔을 높이 치켜들고 웃고 있는 나. 똑같은 필름인데 왜 한국에서 볼 때와 느낌이 다른 것일까. 웃고 있는 내 얼굴도 낯설지만 목소리는 더 생경하게 들린다. 불안정하고 조급하게 외쳐대는 내 목소리 때문에 나는 조금 의기소침해진다. 세상 모든 사람에겐 아니지만, 누군가에겐 정오의 공작처럼 보이고 싶은 순간이 있는데.


M이, 자신은 시사회에서 보겠다며 잠시 나갔다 오겠다 한다. 장을 봐 오려는 것 같다. 나는 P에게 화가 좀 난다. 가장 가까운 마켓이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니 왕복 세 시간이다. 아까 들어오면서 장을 봐오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바가지 모양의 시토로엥이 밀밭 사이길을 꼬물꼬물 기어가다 이윽고 사라져버리는 게 소파에 앉아서도 보인다. P가 일어나더니, 술병 하나와 잔 두 개를 들고 온다. 반주로 마신 와인도 아직 깨지 않았는데. 내가 그러하듯, P 역시, 오랜 시간이 쉬 메워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잔에 그득히 부어서 하나를 건네주고는 술잔을 부딪는다. 쨍, 소리가 너무 크게 울린다. 독주였다. 한 모금 마시고 찌푸리고 있는데 P는 단숨에 마셔버린다.

“칼바도스, 야. 레마르크의 《개선문》, 읽어보았어?”

“아니.”

“그래? 읽었어야 되는데. 할 수 없지 뭐. 그 소설 속에서 바리크라는 남자가 끊임없이 마시는 술이 이거다. 사과주지. 노르망디산이야.”

P는 마치 술을 그 남자 때문에 마신다는 듯 다시 한 잔을 부어서는 라비크를 위하여, 하고는 원샷을 해버린다. 농익은 사과향이 스치는 것 같기도 하다. 스트레이트로 마시기엔 무리라고 생각된다.

“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 영화는, 삶의 표면만을 보여줄 뿐이야. 한번 보고, 네가 제대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으면, 내가 시나리오를 하나 써주지. 영화는 시나리오가 절반이야.”

시나리오를 써줄 수 있다는 P의 말은 빈 말은 아닐 것이다. 나는 P가 고3 때 쓴 소설의 제목과 내용을 지금도 기억한다. 포르노였다. 나는 그의 최초의 독자였고, 유일한 공짜 독자였다. 친구들은 P의 활달한 글씨로 쓰인 그 불법 출판물을 보기 위해 빵 두 개와 우유 하나를 제공해야 했다. 열풍이었다. 웨이팅 리스트가 따로 있었다. 오후 수업시간이었다. 그 소설에 너무 깊이 빠져든 친구 녀석은 짝이 옆구리를 찌를 때까지 선생님이 제 옆에 서서 같이 내려다보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햇보리와 마 선생, 이라……. 노트를 집어든 선생님이 제목을 천천히 읽자, 절반쯤 졸고 있던 반 아이들은 모두 잠에서 깨어나 흘러내린 침을 손들으로 문지르며 장차 이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를 지켜보았다. 노트를 한 장씩 넘겨본 선생님이 P의 이름을 불렀다. 아, 뭐 자랑스러운 내용이라고 맨 앞에 제 이름까지 적어놓았는지. P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선생님은 P의 옆으로 느리게 걸어갔다. 선생님은 지난 시간의 수업 내용을 확인하는 투로 물어보았다. 햇보리가 뭐니? P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여자 거기랑 꼭 닮았잖아요. 선생님은 실실 웃었다. 그 웃음은 분필가루 마시며 교단에서 보낸 세월이 헛되지 않았다는 듯, 제자의 천재성을 발견한 늙은 사부의 웃음처럼 흔연했다. 우리는 선생님이 봐줄 거라고 전망했다. 전교 일등 앞에서 선생님들의 팔은 근육무력증을 일으켰다. 마 선생은, 뭐야? P가 재빨리 대답했다. 애마부인의 남성형입니다. 아이들이 키들거리기 시작했다. 얼굴이 긴 그 국어선생님을 우리는 마 선생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래? 선생님은 조용히 몸을 굽히더니 신고 있던 슬리퍼 한 짝을 벗어 들었다. 나중에 P는, 마 선생이 자신의 뺨을 개화기 예배당 종 치듯 했다고 표현했다. 신성모독적인 표현이었지만 속도와 열정을 비교하기엔 더없이 적절한 비유였다. 나는 P의 뺨을 보고서야 선생님 슬리퍼 바닥이 다이아몬드 무늬라는 걸 알았다. P는, 그런 역경에도 불구하고 두 편의 소설을 더 써서 시리즈를 완결했다.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두 덩이의 빵이 있으면 하나를 팔아 장미꽃을 사라는 코란을 언제 읽었는지 친구들은 그 글을 위해 기꺼이 하루치 간식을 바쳤다. P의 소설에서 크라이맥스가 너무 늦게 온다는 불만도 있었지만 P는, 독자의 요구에 흔들리지 않았다. 야, 진짜 좋은 건 하기 전까지라구. 우리는 그걸 명랑 포르노라 불렀다.


P는 이미 그 글에서 여자의 그곳에 대한 산부인과적 지식을 구사하고 있었다. 일테면 클리토리스라는 용어를 써가면서 페팅의 테크닉을 생물학적이면서도 시적으로 기술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유의 소설책을 일부 베꼈으리라는 혐의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노골적이면서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는 격조였다. 아이들 중엔 혼자 할 때, 누드사진보다 P의 소설을 읽으며 하는 게 더 좋다고 주장하는 놈도 나왔다. 훗날 여자의 몸을 실제로 만질 때마다 나는 늘 그의 소설에서 맛보았던 그 미칠 듯한 몽환의 느낌을 찾았지만, 현실은 번번이 그가 보여준 세계에 미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자기가 얼마나 예쁜지 모르는 열세 살 소녀처럼, 그 작품은 포르노라 폄하하기엔 확실히 눈부신 데가 있었다. 삶이 왜 끝내 아름다운 것인가를 허망하고 불온한 그릇에 담아 그려낸 예술이었다. 감출 수 없는 생의 에너지가 정오의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던 그 문장들. …… 내 기억 속에서 P의 그 시리즈는, 점점 더 불온하게, 슬프도록 탐미적으로 승화되어 갔다. 이후로 종이든 필름이든, 어떤 포르노도 그것만큼의 幻환을 내게 주지 못했고, 인간이 가진 짐승의 속성을 그것만큼 슬프고도 아름답게 표현한 것을 보지 못했다. 내 영화는 어쩌면 그것을 뛰어넘고 싶었던 내 욕망의 자식들이었다. P는, 아직도 그 소설의 내용을 기억할까. 그렇겠지만, 나만큼 세세히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P는 눈으로 화면을 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P의 말 사이사이로 영화의 대사가 토막토막 잘린다.

“저기가 서울인가? 돌아간다면, 여기서보다 더 이방인으로 살겠군.”

“변한 곳만 그렇지. 어떤 덴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데도 있어.”

“네 얘기 좀 해봐. 어떻게 지냈나.”

“내 얘긴 저 필름 안에 전부 들어 있어.”

화면을 바라보는 P의 눈은 조금 풀려 가는데, 나는 그가 조금은 더 열중해서 보아주기를 원한다. 흘려보내듯 보아버리기엔, 너무 많은 열정과 에너지를 저 필름에 쏟아 부었다. 등장인물의 그림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시선의 각도까지 노트에 기록해 가며 촬영한 필름이다. 너의 손은 코리언 퀼트일지 모르지만 죽었다 깨나도 저런 영화는 만들지 못해. P는 어느 새 산만하게 제 얘기만 하고 있다.

“그래? 내 프로젝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니? 늦어도 내후년이면 《오버 더 네이처》에 이 신약에 대한 기사가 실린다. 인류가 달에 첫발을 디뎠을 때나 혹은 복제인간이 지구상의 어딘가에서 탄생하기 위한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뉴스처럼 지구를 흔들게 될 거야.”

“테크놀로지에 있어서의 판도라의 상자가 아닐까.”

나는 좀 삐딱해졌다. P는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과학이 핵산과 단백질의 차원을 넘어서는 거지. 태우면 한 줌 무기물일 뿐이지만, 살아 숨쉬는 인간이란 핵산과 기억, 단백질과 욕망이 혼합된 기이한 존재가 아니겠어?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지. 난 할 수 있어. 난, 기억과 욕망을 관리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의과학자로 영원히 기억될 거야.”

연구에 대한 얘기를 끊임없이 늘어놓는 사이에 화면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있었다.

“……근데, 마지막 장면 있잖아. 이랬으면 어떨까.”

이제 P는 입을 열 때마다 술 냄새를 푹푹 풍긴다.

“아까, 우는 여자의 얼굴 말이야. 여자를 비추지 말고, 차라리 실내의 어두운 모퉁이와 계단만 화면에 잡으면서, 목소리로만, 그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를테면, 보이지 않는 여자의 표정에 더 커다란 슬픔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 감정이 없는 무생물을 화면에 담으면서 말이다. 시들어가는 화병의 꽃도 좋겠지. 슬픔과 후회와 미칠 것 같은 분노를 담기엔 저 마지막 장면은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건 말이지, 이래도, 이래도 안 울 거야? 하고 들이대는 것 같아. 안그래, 신파?”

P의 목소리는 낮지도 높지도 않다. 말을 더듬거나 혀가 꼬부라지지도 않았다. 헝겊으로 둘둘 싼 빈 술병으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느낌이었다. 나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고 생각했다. 무수히 시높을 바꿔가며 어리석어 보일 만치 많은 데모 필름을 만들어보았다. 더 이상의 효과는 없을 거라 확신하며 고른 시퀸스였다. 왜 끝내 그 쪽으로는 상상력이 미치지 못했을까.

“영화는 삶의 그림자일 뿐이야. 그림자는 잡히지 않기 때문에 그림자다. 무언가를 굳이 말하려 하지 말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그려서, 그 무언가가 떠오르게 해봐. 넌, 너무 친절해. 천천히, 익사한 시체가 부패가 진행되면서 물 위로 떠오르듯 그렇게, ……친절한 건 뻔하고, 뻔한 건 지루한 거야.”

M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시차를 핑계로 쉬고 싶다며 일어나다. 계단을 오르는데 P가 내 이름을 부른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P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내게 묻는다.

“안데르센의 어린 시절의 꿈이 뭔지 아니?”

나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대답하지 않는다.

“안데르센의 꿈은, 중국 왕에게 스카우트되어 금으로 된 궁전에서 노래를 부르며 살고 싶다는 것이었어.”

만난 이후 처음으로 P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꿈은, 이루어지지 말아야 하는 거야.”

나는 대답 없이 P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이층으로 올라왔다. 피오르드의 물빛은 그 사이 회색으로 바뀌었다. 바깥은 더 이상 어두워지지 않는다.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밝음 속에서 노란 야생화 꽃빛이 아까보다 더 선명해졌다. 줄기를 자르면 일시에 둥실 떠오를 것 같다. 내가 여기까지 온 건 P에게 다만 필름을 보여주려던 게 아니다. 나는 오슬로에서 내 필름이 상영되는 것을, 평론가와 언론의 주목을 받는 나를, 그동안의 내 영화 성과가 실린 보도자료를 P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P는 시사회에 같이 가지 않겠다 한다. 내 영화에는 내 욕망만이 도드라져 보인단다. 집착만이 선명하단다. 친절하고 뻔하고 지루하단다. 방약무인한 태도로 논문 발표를 하던 P, LA의 상류층 환자를 상대하는 병원에서 오리엔탈 익스프레스, 라 불리며 환자들의 신으로 군림했다던 P, 천국의 풍경이 이러할까 싶은 스카디나비아 반도의 한 점, 운자 크레보에 자리 잡은 채, 이제 기억과 욕망을 제어하는 신약을 출시하겠다는 P, 그에겐, 이곳의 풍경처럼 밤이 없다. 끝내 어두워지지 않는 대기와 점점 요염하도록 노랗게 빛을 발하는 야생화와 얼어붙은 강처럼 보이는 피오르드를 바라보며, 나는 창가에 오래 서 있었다. 들판 끝에 한 점이 보인다. 귀가를 서두르는 딱정벌레 한 마리가 날아온다. M이 돌아오고 있다. P야말로 왜 저런 차를 타는 걸까. 유머를 즐기는 P가 제 눈부신 일상에 던지는 경쾌한 농담인가. P가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것이, 그가 소유한 것 중 가장 하찮아 보이는 낡은 시트로엥에 담겨 다가오는 걸 보자 나는 그만 울고 싶어진다. 기억과 욕망을 조절할 수 있는 약이라.

밤은 끝내 검어지지 않는다.


                                      

                                   *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앞질러 말하는데 내가 더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2등은 곧 꼴찌가 되는 치열한 신약 개발 연구소 생활은, 심장에 데이지꽃을 수놓은 일보다 더 인내와 창의력을 요구할지도 모르겠다.

M은 어제 어디까지 장을 보러 갔다 왔는지 아침 식탁엔 양파를 듬뿍 넣은 매콤한 감잣국과 연어구이에 고춧가루 알갱이가 셀 수 있게 뿌려진 양배추 겉절이가 올라와 있다. 오리엔탈 마켓이 흔한 북독일과는 또 다른 이국생활의 어려움이 보였다. 라면이라도 두어 박스 들고 올걸, 싶었다. 어제 맨얼굴이었던 M은 아침에 살짝 화장을 하고 있다. 차에 오르기 전, M은 P의 옆으로 가 내겐 들리지 않게 무어라 무어라 얘기를 하고는 돌아온다. P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다. 시동을 걸자 시트로엥은 낡은 디젤차만큼이나 요란한 소리를 낸다. P에게 손을 흔들고는 안전띠를 맨다. 시사회는 오후에 있다. 일찍 가서 바이킹 박물관이나 뭉크 미술관이라도 둘러보라고 말한 건 P다.

완만한 높낮이가 반복되는 도로의 양쪽으로 양치식물군이 거대한 양탄자처럼 깔려 있다. 이제 내 마음속에 M에 대한 열정은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 아니라 P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모퉁이에서 가끔 M이 불쑥 떠올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M의 얼굴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그녀의 팔이다. 흰 반소매 교복 아래 칠 센티쯤 보이던, 볼 때마다 가슴이 꽉 막혀버리던, 교복의 흰색과는 달랐지만 희다, 고밖에는 말할 수 없었던 팔. 그 무렵 내 욕망의 대상은 M의 입술도, 젖가슴도 아니었다. 교복 아래 보이는 그 팔을 한 번만 쓸어볼 수 있기를 얼마나 열망했던가. 손바닥에 그녀의 팔이 닿는 상상만으로도 내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숨결은 거칠어졌다. 그 팔이 내 손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손등에서 팔꿈치가지 몇 개의 크고 작은 점이 보인다. 어쩌면 옛날부터 있었던 걸 내가 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나비 떼처럼 팔랑거리며 흘러든 차창 밖 햇살이 M의 팔에 내려앉는다. 점은 나비의 눈처럼 흔들리며 춤을 춘다. 처음부터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은 환상과 실체가 이런 식으로 뒤섞여져 있었다. 내 기억 속에서 사람의 살갗이 아니라 천사의 그것처럼 보얗고 스스로 빛이 나듯 산란된 느낌으로 떠오르곤 하던 그 팔은 이제 더 이상 내 호흡의 가닥을 흐트러뜨리지는 못한다. 다만 아릿하고 둔한 적막이 명치에 천천히 고여든다.

교내 문학 서클에 가입해서 활동을 활발히 한 건 겨우 고1의 이 학기 몇 달에 불과했다. 2학년에 올라와서는 벌써 입시의 중압감 때문에 친목 모임 비슷하게 한 학기에 두어 차례 만나는 게 전부였다. M은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절실함은 꼭 언어로 전달하지 않아도 전해진다고 믿었다. M 역시 내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가까워지지 못한 건 나 때문이다. M의 앞에서 말을 하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건 물컵을 들면 떨어뜨릴지도 모른다는 enfudnaq다 더 크고 막막한 것이었다. 여럿 앞에서 이야기할 땐 아무렇지도 않다가 M에게 말을 하면 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강박이었다. 말을 하기 전에 벌써 드러난 팔을 보는 순간 내 호흡은 흐트러져버렸다. 삼 학년 때 가입도 하지 않은 서클품에 P가 M과 함께 들어섰을 때, 나는 불안과 분노와 체념을 동시에 느꼈다. M에게 가장 합당한 연인은 P, 외엔 있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P와 나란히 들어서는 M의 표정에서 나는 사랑, 이라는 추상을 그린 그림문자를 읽고 있었다.

P가 미국으로 갈 때 M도 같이 떠났다. 뒤늦게 영화학교에 등옥하면서 내가 뉴욕으로 간 게 그 일 년 뒤다. 동부와 서부에 떨어져 있긴 했지만, 근처로 촬영여행을 갈 일이 있어도 한 번도 P를 찾아가 보지 않은 것은 M 때문이었을 것이다. M이 그때의 내 마음을 몰랐을 리는 없다. 오슬로 시내로 들어설 때까지의 침묵이 꽤나 불편했던지, M은 시가지가 보이기 시작하자 명랑하게 물어보았다.


“어디부터 갈까? 민속 박물관? 바이킹 박물관도 볼 만한데.”

“뭉크나 보러 가지.”

초행이 아닌 듯 M은 곧바로 길을 잡는다. 경사진 넓은 잔디밭 위에 세워진 미술관은 미니멀한 외형이 인상적이다. M이 티켓을 끊는 사이 나는 미술관 건립이 일본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새겨진 유리벽 아래 서서 기다렸다.

프린트로 흔히 보아온 〈사춘기〉앞에 사람들이 여럿 서 있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파리한 소녀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발가벗은 소녀는 두 팔을 늘어뜨려 벗은 몸을 가리려 하고 있다. 이미 몸에서 움트는 관능의 기운을 감추기엔 팔이 너무 가늘다. 오므린 무릎을 벌리면, 비릿한 첫 생리혈을 흘리며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소녀. M이 옆에서 중얼거린다.

“난, 이게 뭉크의 자화상이라고 봐.”

“그래?”

“일생을 신경쇠약과 죽음에 대한 강박증에 시달린 뭉크의 표정이 저러지 않았을까.”

교과서에 실렸던 그림을 실제로 보는 일은 늘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모나지자〉나 〈이삭 줍는 사람들〉앞에 서면, 그것들이 사실은 그리 크지 않다는 것, 프린트와 다른 원화가 주는 놀라움과 충족감이 기대만큼은 대단하지 않다는 것, 충족된 욕망이 주는 포만감 앞에서 피어오르는 아릿한 허무, 같은 걸 느끼게 된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그 짤막한 인식의 끝에 왜 P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프린트와 원화의 차이는 뭘까. 그림값 같은 것 말고.”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니다. 나는 그림에는 애초에 조예도, 각별한 애정도 없는 사람이다.  눈을 깜박이며,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M의 표정에서, 나는 다시 교복 아래 칠 센티쯤 드러났던 팔을 떠올린다.

“마음의 겹처럼 덧칠된 물감이 전해 주는 부조감은, 프린트를 아무리 잘 찍었다 한들 살릴 수 없지 않을까? 프린트에선, 어둠이 보이지 않아.”

“그래? 그런데, 〈절규〉는 왜 없지?”

실내를 둘러보며 나는 그 그림을 찾아보았다.

“〈절규〉는, 많아.”

〈절규〉는, 많아. 그 말은 어쩐지 비장하게 들린다. 〈절규〉가 많다니. 마지막 방에 이르러서야, M이 〈절규〉는 많아, 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하얗게 칠해진 채 관람객을 위한 나무 의자 하나 없는 그 방은 온통 〈절규〉의 방이었다. 기억 속의 그 표정, 처음엔 성별을 알 수 없는 한 사람의 일그러진 얼굴이 먼저 보인다. 죽음의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친 듯 공포에 질린 눈, 영원히 닫힐 것 같지 않은 동그란 입술, 핏빛 하늘을 색채가 아니라 비명의 음파처럼 소용돌이 치고 배면背面의 두 남자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유유히 걷고 있다. 자세히 보면 검푸른 물빛 사이로 작은 배와 교회당이 떠 있다. 큰 교실만 한 그 방엔 모두 〈절규〉시리즈로 채워져 있다. 단색 판화, 혹은 채색 판화, 조금씩 색채의 톤이 다른 회화작품, 연필 스케치, 큰 〈절규〉, 작은 〈절규〉, 그리다 만 〈절규〉, 무채색의 〈절규〉, 붉은 〈절규〉, 검은 〈절규〉, 희미한, 손바닥만 한, 고막을 찢을 듯한, 〈절규〉. ……한순간, 나 역시 그림 속의 그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귀를 막고 싶다. 그 방은, 너무 날카로워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고음역의 절규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가끔 여기 와서 시간을 보낼 때가 있어. ……이 남자, 뭉크. 그림을 보면, 일찌감치 자살이라도 한 줄 알았는데, 팔십이 될 때까지 살았더라구.”

“배신감이야?”

M은 희미하게 웃는다.

“위로 같은 거지. 가족력인 폐결핵에 대한 공포, 이상성격자였던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끊임없었던 정신병력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오래 살다니. 가혹한 현실이 오히려 그를 붙들어주었다고 생가가하면, 위로가 돼.”

M의 목소리가 고즈넉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나 대신 누군가가, 혹은 나 아닌 누군가도,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고 있구나, 그런 위안.”

M. 네게도 위로가 필요한가. 삶에 있어 불가능을 모르는 너의 남자, 천국과도 같은 운자 크레보의 집, 그리고의 음악 같은 풍광 속의 일상, 젊은 나이에 이미 이루었던 부. 무엇이 더 필요하니.

“어느 게 진짜 〈절규〉야?”

내 질문에 M이 하, 소리를 내며 웃는다. 나도 같이 웃는다.

“대체로 완성된 회화작품 세 개 정도를 꼽지만, 여기, 가짜 〈절규〉는 없어. 난, 이 연필 스케치가 참 좋아. 교과서에 실린 건 저 작품이지 아마.”

M이, 손가락으로 섬세한 선으로만 이루어진 스케치 하나를 가리킨다.


둥글게 휘어져 들어온 만의 가장자리에 있는 노상 까페에 날 앉혀 놓고 M은 찐 새우와 맥주 두 잔을 가져왔다. 새우는 무척 차갑다. 한낮의 파도가 애무하듯 방파제를 핥고는 한 호흡을 머무대 밀려간다. 기름진 깃의 갈매기가 날아와 새우를 달라 보챈다.

“갈매기가 이렇게 큰 줄 몰랐어.”

“가까이 봐서 그래.”

새우의 짠물이 손가시에 배어 쓰라리다. 맥주 기운이 퍼지면서, 방파제를 따라 정박해 있는 어선처럼 내 마음이 아슴아슴 흔들린다. 나는 P에게 물어보지 못한 걸 M에게 묻는다.

“잘나가던 외과의가 왜 갑자기 면역학으로 바꾼 거지?”

“글쎄.”

M은 바다를 바라보며 입을 살짝 깨문다. 그러더니 고개를 젓는다.

“나도 잘 몰라. 다만, 자신의 전부를 걸어보고 싶은 어떤 게 필요했던 것 같아. 그때. 때론 걷고 싶은데 늘 날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라고나 할까.”

그게 P였다. 그래서 그에겐, 모든 것이 가능한 생이 지루했단 말인가. 중국 왕 앞에서 노래하는 가수가 되고 싶었던 안데르센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은 게 더 나았다는 말일까. M은 여전히 말을 아낀다.

“지금 하고 있는 연구는 어때?”

마지못한 듯 M이 대답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불가능해 보인다는 걸 알고 선택한 프로젝트가 아닐까?”

P는 M에게 연구에 대해 말하지 말라 했었다. M의 대답은 어쩐지 그녀가 전혀 모르고 있지는 않다는 느낌을 주었다.

“연구소는, 오슬로에 있어?”

대답 대신 M은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늦겠어, 하며.


시사회를 끝내고 나왔을 때 시내 풍경이 꽤 소란했다. 낮에 들렀던 그 미술관에 도난 사고가 있었다 한다. 〈절규〉와 〈마돈나〉, 두 점을 가져갔는데, 한낮의 미술관에서 총기를 든 그림 도둑들은 순식간에 그림을 떼어내서 그야말로 절규하는 관객들 틈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한다. 너무도 유명해서 팔지도 못할 그림을 왜 자져갔을까? 욕망과 어리석음이 없다면, 세상은 클라이맥스 없는 흑백의 무성영화 같겠지.

저녁시간이 지났는데 여기선 도무지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다. 프리웨이로 들어서자 M은 쫓기는 사람처럼 운전을 한다.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을 때면 엔진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났다. 나는 구멍 뚫린 바닥을 툭툭 차며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취미야. 가나에 대한 향순가?”

“누가 가난에 대한 향수 같은 걸 갖겠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연구에 가진 걸 전부 쏟아 붓고는 한 푼도 가져오질 않는데.”

M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엔진 소리에 섞인다.

“우리 요듬 생존 모드야. 언제 잔액이 전부 사라져버릴지.”

갑작스런 M의 말에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바닥에 뚫린 구멍만 내려다보았다. M은 아주 길게 천천히 숨을 내쉰다. 격정적으로 한순간 쏟아버린 말을 벌써 후회하는 듯하다.

“거대과학 쪽은 원래 그래. 인내와 연구비와의 싸움이지. 그러다 어느 순간 놀라운 결과가 나올 거야. 저 녀석이라면, 뭔가 만들어낼 거라고 봐.”

집에 도착할 때까지 M도, 나도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P가 돌아왔는지, 창에 불빛이 환하다.

황량한 아름다움의 극치로 보였던 뜰은 하루 만에 빛을 잃었다. 가장자리 관목에, 몇 년 동안 정리하지 않은 넝쿨식물의 마른 줄기가 켜켜이 엉긴 걸 나는 쓰라린 마음으로 쳐다본다. 쓰라림은 P가 아니라 M 때문이다. 차에서 내리기 전, 떠날 때까지 P에게 아무 내색도 하지 말아달라고 M이 말했지만, 그러지 않아도 내가 먼저 너 이렇다며, 간섭할 이유도 없었다. 차문을 열자 소매 아래 소름이 오스스 돋아난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전기밥솥에서는 김이 오르고 있고 참치찌개 냄새가 매콤하다.

밥을 다 해놨네? 하는 M의 목소리가 제법 명랑하다. 그 명랑한 목소리는, 너는 이방인이며, 잠시 머물다 떠나면 그뿐, 이 영역을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나에 대한 경고처럼 들린다. 어쨌든 불행을 연기하기보다는 평화를 연기하는 게 쉽지. 벽난로의 불빛이 타다거리며 춤추듯 흔들린다. 벌써, 싶지만 장작을 피우지 않았다면 추울 것 같다. 붉게, 일렁이는 불은 그 색깔만으로도 마음을 데워준다. 티브이를 보며 혼자 맥주라도 마셨는지, 실내엔 희미한 알코올 냄새가 떠돈다. M이 식탁을 차리는 동안 P가 술 한 병을 들고 나온다. M이 P의 눈을 보며 고개를 젓는다. P는 당당하다.

“벗이 먼 길을 찾아왔는데 술 한 잔이 없으면 안 되지.”

밥을 먹는 동안, M과 내 잔에 부어놓은 술은 그대로인데 P는 나머지를 혼자서 다 마셔버린다. 그리고는 또 맥주와 위스키 병을 들고 나온다.

“봐주는 사람 있을 때 폭탄주 제조 한번 해보자. 시사회는 어땠어?”

“괜찮았어. 반응도 좋았고.”

M이 대신 대답했지만 P는 못 들은 것처럼 묻는다.

“오슬로는 어때?”

나는 P가 만들어놓은 폭탄주를 홀짝 마셔버린다. 내가 마셔서 없애버리는 것 외엔 방법이 없어 보인다. 그래도 P의 속도를 따를 수가 없다.

“이름만큼 예쁘진 않은 도시더군.”

“뭉크 미술관엔 가봤나? 거기 그림 두 개가 없어졌지?”

티브이 뉴스를 보고 알았을 것이다.

“비밀을 하나 알려줄까?”

P의 얼굴은 꽤나 진지하다.

“내가 훔쳤어. 아닌 것 같아? 내가 훔쳤다니까. 마누라가 거기만 한 번씩 갔다 오면 사흘은 우울해 있는 거야. 내 예쁜 마누라가. 날개 안 달린 천사 같은 저 여자가. 그래서 내가 훔쳤다. 아주 간단했어. 철사줄을 자르고 들고 나오기만 하면 됐으니까. 보여줄 수도 있어.”

그녀의 우울의 원인이 다만 그림이라고 생각하냐고 되묻기엔 P는 너무 취해 버렸다. 대신,

“그래? 한번 볼까?”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P는 입을 길고 동그랗게 벌린 채 눈을 부릅뜨고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는다. 아아, 소리 지르듯 목을 길게 뽑으며. 벌린 입을 쳐다보고 있자니 내 귀에만 들리지 않는 절규가 실내에 가득 찬 것 같다. M은 못 본 척하고 설거지를 하고 있다. 매혹적인 인형극의 무대 뒤를 우연히 보아버린 어린 소년처럼 나는 발바닥이 간지럽다.

“마돈나는, 그러니까 내 마누라가, 마돈나야. 벗으면 똑같아. 절정에 이르게 해주면 꼭 그런 표정을 짓는다니까?”

P는 소파에 드러눕듯 하고는 눈을 감고 웃기 시작한다. 싱크대 앞에 선 M이 물을 켜놓은 채 고개를 숙인다. 어느새 사위고 있는 벽난로 불빛을 가리키며 P가 주절거린다.

“여긴 팔월이 가기도 전에 추워져. 여보. 장작을 몇 개 더 넣어. 곧 스리 독 나이트가 올 텐데. 북극의 어느 곳에선 못 견디게 추우면 개를 껴안고 자, 조금 추우면, 한 마리, 더 추우면 두 마리, 아주 추우면 세 마리……. 더 추운 날엔 손님에게 마누라를 내놓지. 네가 왔는데 난 줄 게 없어. 마누라밖엔. 똑같아. 절정에 이르면 똑같은 표정을 짓는다니까. 네게 줄 건, 마돈나밖엔 없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P의 뺨을 갈겼다. 아픔을 못 느끼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P의 가슴에 다시 주먹을 한 대 날렸다. 그만해. M이 울 듯한 목소리로 낮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면, 피를 볼 때까지 주먹을 휘둘렀을지도 모른다.

 

강의 저쪽에서 끊임없이 질주하며 나를 유혹하던 너의 등. 그 뒷모습을 응시하며 휴가를 반납할 수 있었고, 바닷물에 몸 한 번 담그지 않고 청춘을 보냈으며, 주전자 가득 커피를 끓여놓고 밤을 샐 수 있었는데. 비굴과 모멸을 비타민처럼 기꺼이 받아 삼켰는데. 어쩌면 나의 지난 생은 너의 삶의 그림자였다. 나는 너를 따라잡고 싶었고 겹쳐지고 싶었고 한 번만이라도 너를 밟고 지나가보고 싶었다. 모든 걸 잃은 건 P가 아니라 나인 것처럼, 그가 일순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을 무의미한 것들로 만들어버린 것처럼 짓밟힌 모래집처럼, 나는 의자에 푹 주저앉았다. 사실이라니까? 주절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다. 소파 위에 비슥이 드러누운 채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귀를 손바닥으로 막고는 끝도 없이 주절거린다.

“마돈나 맞아. 감은 눈을 뜨면, 눈빛이 노래져. 저 여자, 내겐 천사야. 천사 하고는 섹스를 할 수 없잖아.”

남은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셔버리고는 P는 소파에 길게 눕는다. 그리고는 날 쳐다보며 살짝 미소를 짓는다. 눈가에 가늘게 주름이 잡히며 세포 하나하나가 웃는 듯한 저 웃음. 같이 지낸 세월이 짧지 않았지만 P가 이토록 행복감으로 충만했던 순간을 본 적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계단을 올라오는 M의 발소리가 들린다. 택시회사에 전화를 했더니 오십 분 후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P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다시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다. M이 노크도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M의 얼굴을 마주 바라볼 수가 없어 창밖을 내다본다.

“미안해. 저사람, 언제부턴가 마시기 시작했어. 그의 삶의 정점에서. 왜 마시기 시작했는지는 그도, 나도 몰라. ……나중엔 술을 마시고는 수술실에 들어가기도 했어. 운전도 못할 정도로 집도를 한 거지. 그래도 의료 사고를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렇지만, 그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거잖아. 처음엔 병원에서도 참아줬어. 환자들이 그를 찾으니까. 끝내 자르는 대신 병리학 쪽으로 보냈어. 끊임없이 마시는 중에도 그는 탁월한 논문을 써냈어. 시도 때도 없이 손이 떨리기 시작하면, 조교가 위스키를 얼른 종이컵에 따라다 가져다주곤 했어. 병원에서 잘리기 전에 먼저 사표를 냈어. 프랑수아 자코브 박사팀의 면역학 연구소로 가게 됐다고 했을 때 사실인 줄 알았어. 여기 와서야, 아니라는 걸 알았지.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했고 연구 성과가 나타나면 와서 모셔갈 거라고 큰소리를 쳤지. 사설 연구소를 하나 차렸지만 개인이 감당하기엔 시스템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어. 실력 있는 연구원들도 몇 명 합류했어. 처음엔. 그러다 하나씩 그만두었어. 자금도 문제였지만 연구 성과에 대한 회의가 더 큰 이유였겠지. 가진 걸 다 쏟아 부었어. 예비된 추락의 도정을 밟아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는 끝내 큰소리만 쳤어. ……지금은, 저 사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 나는 뺏고, 그는 감추고 숨어서 마시는 게 요즘의 우리 프로젝트야.”

“알코홀릭은 명백한 병이야. 왜 고칠 생각을 안 해.”

M이 고개를 젓는다.

“알잖아. 누가 저 사람을 컨트롤할 수 있겠어. 어제, 들어오기 전에 저 사람 술 사왔지? 밤에, 미친 여자처럼 온 집을 뒤졌어. 어디다 숨겼는지 찾을 수가 없었어. 저이는 감추고 나는 찾아서 버리는 건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전쟁이야. 병원에서 근무할 땐 특수 제작한 점퍼를 입고 양쪽에 휴대용 술병을 꽂아놓고 마시기도 했어. 나 몰래 술을 사와서는 정원 여기저기에 묻어놓고 스트로를 꽂아놓고 마시기도 해. 나는 결코 찾을 수 없는 곳에. 개처럼 땅바닥에 엎드려서, 얼굴을 흙바닥에 박고는 술을 빨고 있는 걸 커튼 틈으로 보고 있으며, 내가 정말, 미칠 것 같아.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거나,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저건 더 나빠. 이미 미안하단 생각도, 죄책감도 없어.”

나란히 서서 나는 M이 소리 없이 흘리는 눈물을 읽는다. 그녀의 젖은 숨결이 공기를 미세하게 가로질러 내게로 흘러온다. 나는 눈을 감고 캄캄한 어둠을 들여다본다.

“정말 견딜 수 없을 땐, 차를 달려서 〈절규〉의 방에 가서 서 있다 오곤 했어. 내가 여기서, 누구 앞에서 울겠어? 돌아오는 차 안에서 늘 울었어. 소리 내어 엉엉 울면서, 붉은 신호등 앞에선 브레이크도 밟으면서, 눈물이 턱에서 모여 허벅지가 뜨뜻해지도록 뚝뚝 흘러내리는데, 지나가는 사람은 없나, 좌우도 살피면서, 그렇게, 그래도 살겠다고 운전을 해서 저 길을 다시 돌아오는 거야.”

나는 M의 팔뚝에 손을 얹는다. 더 이상 날 숨 막히게 하지도, 스스로 빛을 발하지도 못하는 팔. 제 입에서 나온 절규가 제 귀에 들리지 않도록 귀를 틀어막아야만 하는 팔. 어두워지지 않는 저녁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처럼 현실감이 없다. 겨우 이틀, 나는 벌써 어둠이 그립다. 끝내 하늘은 검붉어지지도 회오리치지도 않고, 화장기 없는 스칸디나비아 처녀의 낯빛처럼 희끄무레하기만 하다.

“P가 뭐가 부족해서 알코홀릭이야?”

M은 고개를 젓는다. 하긴 이러저러해서 오늘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고 선포하고 시작한 사람이라면 중독에 이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M의 목소리는 물속에서 들려오는 듯 젖어 있다.

“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지? 백야가 계속되는 동안은, 덧창 없이는 잠들 수가 없어. 밤이 없으면, 잠들지 않고 일하면 썩 훌륭한 인간이 되어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더라. 저 사람에겐, 자기 인생이 끝없는 하얀 밤처럼 느껴졌나 봐. 기억과 욕망이란, 신의 영역이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선택했겠지. 저 사람은, 그림자를 찾고 싶어 하는 거라고 생각해.”

전조등을 켠 콜택시가 밀밭 사이로 달려오고 있다. 꼭 가야 한다면, 오슬로까지 배웅해 주겠다며 M은 몇 번이나 말했지만, 슬픔의 한 조각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쓰는 M의 목소리를 더는 견딜 자신이 없다.

“미안해. 사흘 정도는 감출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차문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M은 그렇게 말하며 희미하게 웃는다. 대낮에 길을 잃은 사람처럼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아득하다.

이제 다시는, M을 볼 수 없을 거라는 것을 나는 안다. 호텔 오슬로 플라자. 짧게 말하고 나는 의자에 몸을 묻는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황량한 뜰에 백야의 희미함 속으로 스며들어버릴 듯 서 있는 M의 모습을 본다면,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M의 아득한 눈동자에서 노랗고 작은 달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돈나를 찾아 M의 못을 벗기고 싶은 내 욕망을 눈꺼풀 속에 가두고, 나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차는 사라진 밤을 찾아 달려가듯, 길의 소실점을 향해 나아간다.



                                   * 

새벽에 잠들어 열한 시 무렵에야 일어났다. 식당으로 내려가 아점을 먹고 올라와 자료를 챙겼다.

오후에 오슬로 대학에서 있을 강연이 이번 일정의 마지막이다. 영어 강연 원고는 미리 준비해 왔으니 읽으면 될 것이다. 원고는 아마, 백 번쯤 읽었을까. 읽으면서, 매번 내 앞에 앉아 있는 가상의 청중은 단 하나, P였으니 오늘 나는 아무도 없는 텅 빈 강당에서 원고를 읽어야 할 것이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통역을 쓰기로 했으니 일정에 대한 부담은 없다.

호텔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뭉크 미술관으로 가자고 했다. 기사는, 어제 그곳에서 도난 사건이 있었다며, 주요한 두 작품은 볼 수 없을 거라고 한다. 그래도 갈 거냐는 질문 같았다. 그 없음을 보러 가는 것이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경비가 삼엄할 거라 예상했지만 뜻밖에 미술관 주변은 별 변화가 없다. 티켓을 사서 들어가니, 실내는 걸어 다니기가 어려울 만큼 북적이고 있다.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폴리스라인이 쳐진 벽 앞에서 그림이 걸려 있던 휑한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그들 틈에 서서 비어 있는 공간을 오래 바라보았다.

빈 벽은 녹슨 청동거울처럼 제 앞에 서 있는 무수한 얼굴들을 소리 없이 삼키고 있었다.

강연에 온 학생들의 질문과 태도는 진지했다. 그들은 뜨겁고 나는 차가웠다. 질문에 대답해 가면서, 나는 점점 견딜 수 없다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뼈가 훤히 보이는, 앙상한 골격뿐인 영화야. 뻔하고 친절한. 매혹은 뼈가 아니라 살에서 오는 거야. 엑스레이엔 잡히지 않는 살, 말이야. 누구도 분석할 수 없는 필름을 만들어봐. 설명하려들면, 빛은 사라진다. 나는 에밀 쿠스트리차보다 한 수 윈데, 너희들이 몰라주는구나, 내가 만든 건, 〈양들의 침묵〉인데, 이놈들이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그런 오해도 하지 마. 술에 취해 지껄이던 P의 말이 도깨비풀처럼 내 필름에 덕지덕지 들어붙어 있었다.

일정을 모두 끝내고서야 한 주일 동안 내가 얼마나 긴장하며 보냈는지를 알았다. 호텔로 돌아오는데 혓바늘이 돋고 두통이 시작되었다. 쉬고 싶었다. 가방을 싸놓고 술을 한잔 마실까 하다 멜라토닌 한 알을 삼키고 자리에 누웠다. 약효는 삼십 분이 지나자 나타났다.

꿈 없는 잠을 자르며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들자, 단정한 영어로 누군가 내 이름을 확인한다. 낯선 목소리가 발음하는 내 이름은 짧은, 세 번의 비명처럼 들린다. 초록빛 전자시계가 3시를 막 지나고 있다. 바에서 걸려온 전화다. 바의 문을 닫을 시간인데 당신의 친구가 찾는다. 그는 카드도 가져오지 않았다. 당신이 체크를 해줄 거라고 했다, 는 말을 하며 그는 P의 이름을 역시 짧은, 세 번의 비명처럼 또박또박 발음한다.

“나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다시, 그 사람도 당신처럼 한국인이며, 술을 매우 많이 마셨다는 얘기를 반복한다.

“나는, 그런 사람 모릅니다. 다시는, 잠을 깨우지 말아주세요.”

내 목소리는, 느리고 냉정하다. 아침이 오기 전에 그를 세 번이나 부인하기는 싫어, 전화를 끊은 후,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오슬로에서의 사흘을 나는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기로 한다.

오슬로에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 P는, 내 안의 불꽃이었다. 그가 사라지면, 나 역시 불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사그라지고 말 것을 나는 알고 있다. P를 모른다 한 것은, P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잠은 우주 밖으로 달아나버렸다. 일어나 나무 덧창을 연다. 나무들은 정령처럼 그림자가 없다. 밤은 끝내 어두워지지 않는다. 나도 저 투명한 밤이 두렵다. 하얀 밤이여, 나뉘어라. 슬픔도 아닌 것이, 회한도 아닌 것이, 물이 되어 내 눈에서 밀려나온다. 밤은 그제야 출렁이듯 왜곡되며, 둥글게 소용돌이친다. 밤의 하얀 폭이 세로로 쪼개지며, 그 틈으로 검붉게 질퍽이는 덩어리들이 뭉클뭉클 밀려 나온다. 나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귀를 감싸며 혼자 중얼거린다.

나는 P를 만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고.

〈끝〉




1960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폭설〉이,

2001년 《세계의 문학》 소설 부문에 〈비소 여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감성과 지성, 내면과 서사의 반목을 훌륭하게 통합해 낸

《장미빛 인생》으로 획일화된 문단에 변화의 물꼬를 텄다는 평을 받았다.

소설집 《나의 피투성이 연인》,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가 있다.

2002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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