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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風景

[스크랩] 사진은 시를 떠올리게 한다

by 진 란 2007. 7. 8.

시를 읽으면 이미지(사진)가 생각나고, 사진(이미지)을 보면 시가 생각난다. 그러니 작심하고 사진을 찍을 때 마음속으로 시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내가 찍은 사진은 내가 떠올린 시에 비해 한없이 초라하지만) 아래 배 사진을 찍을 때, 나는 장석남 시인의 <마당에 배를 매다>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마당에 배를 매다>를 사진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겨 부러 배가 있는 곳으로 걸어 내려갔다.

 

사진을 보고 어떤 이는 장석남 시인의 <배를 밀며>를 떠올렸다고 했으니, 성공한 셈인가. 아무튼 덕분에 시인의 ‘배 3연작’을 다시 찾아 읽어봤다. <마당에 배를 매다>, <배를 매며>, <배를 밀며>. 시에 별 관심이 없는 분도 한 번 마음을 열고 읽어보길 권한다.

 

 

 

마당에 배를 매다 / 장석남

 

마당에
녹음(綠陰) 가득한
배를 매다

 

마당 밖으로 나가는 징검다리
끝에
몇 포기 저녁별
연필 깎는 소리처럼
떠서

 

이 세상에 온 모든 生들
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를
마당가의 풀들과 나와는 지금
가슴 속에 쌓고 있는가

 

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
영혼
혹은,
갈증

 

배를 풀어
쏟아지는 푸른 눈발 속을 떠갈 날이
곧 오리라

 

오, 사랑해야 하리
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
뒷모습들

 

*

 

배를 매며 /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 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

 

배를 밀며 / 장석남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출처 : 낯설게 하기
글쓴이 : 고준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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