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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風景

[정윤천]시집 <구석> 출간-실천문학사

by 진 란 2007. 6. 21.

 

  

구석

 저자 : 정윤천
  

   실천문학사 刊
   
   

 


지역 문단을 지키며 꾸준히 시작 활동을 펼쳐온 정윤천 시인의 신작 시집 『구석』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만 4년 만에 펴내는 네번째 시집이다. “시가 관념의 조합이 아닌, 실재하는 삶의 무늬 그 자체임을 잘 보여주”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박제된 문자의 조합이 아닌, 꿈틀꿈틀 움직이며 소리와 맛을 내는 변방의 언어, 인지가 아닌 감응이 터뜨린 언어”(최영철 시인)를 날것 그대로 살려 쓰면서 지나온 삶의 자취와 아렴풋한 추억 속에 떠오르는 낡고 오래된 풍경의 그윽함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이 시집을 읽는 동안 나는 무엇보다 ‘뜯어말겨’ ‘엥겨주지’ ‘때까우’ ‘껀정해도’ ‘가시낭구’ ‘쩌어기’ ‘봉다리’ ‘밥풀테기’ ‘할마씨’ ‘거디었다’와 같은 말들하고 재미있게 놀았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이 말들하고 킥킥거리며 놀다 보면 정윤천이 얼마나 뛰어난 리얼리스트이자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낭만주의자라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좀처럼 보기 드문 이 한량풍의 껀죽한 시인 덕분에 우리 시가 오랜만에 촉촉한 물기를 머금게 될 것 같다. “한번쯤은 이야기하고 갔으면 싶어지네”와 같은 문장에서 ‘갔으면’에 감도는 요상한 물기는 또 얼마나 유쾌하며 감칠맛이 도는가. ―안도현(시인)




아련한 그리움 속의 풍경들

‘시로 쓰는 후일담처럼 지나간 한 시대를 추억하는 정윤천의 시에는 아련한 그리움과 애잔한 슬픔이 묻어나온다. “우리들이 이후로도 오래 견디며 살아가야 할 찌푸린 세월의 저쪽에다가 그래도 치받아보았을, 그 중에서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았을, 한 잎의 흔들리는 까마득한 그리움”(「토란잎 우산 같은 것에 대하여」)처럼 그의 시는 기억 속에서 솟아오른다. 섬세한 관찰과 정밀한 묘사로 사라져가는 풍경을 그려냄으로써 시인은 바쁜 도시의 일상 속에서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지난날의 소중한 기억을 일깨운다. “선운산 인근 바닷가 마을에서 수 계절을 보낸 적이 있”던 시인은 그곳에서 “물소리는 물의 소리를 내면서 울고, 나뭇잎 한 장도 제때 앞에 이르러야만 제 빛을 지우던 일들이 바라보”(「시인의 말」)였다고 고백한다. “모든 것들은 지나가고/모든 것들은 머물다 간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시인은 쓸쓸한 마음자리의 한편에서 “먼 곳을 향해 젖어 있는 눈시울 같은 기억”(「지나간 자리」)과 “가끔 쇳내를 뒤집어쓰고/혼자서 녹이 슬기도 하겠지만” “먼지 둘러쓴 시골 버스”(「풍경」)처럼 무심히 지나가는 풍경을 되살려내며 따뜻한 손길을 건넨다.

시로 삼아서 시집에 넣기에 만만한 것이 하나 있다. 외진 상가 부근(삼천리표 자전거 대리점 옆)이거나, 물 간 고등어 한 손 같은 것들로, 해찰 많은 걸음에 기대어 남부여대하던 허름한 장바구니의 동구 끝에 퍼질러 앉아 있기도 한다. 대량생산을 위하여 벨트를 걸거나 자동 라인을 가동하지 않아도 되는 마지막 수공업과도 같은 이발소여, 그렇게 시집과 이발소는 여겨볼수록 닮아 있다. (중략) 애초부터 그들에겐 社訓이라곤 없다. 강령도 따로 없어서 꼴리는 대로 행간을 내거나 가르마를 타기도 한다.//삐걱임 많은 의자에 걸터앉아 녹슨 바리캉에 틀기름을 치기라도 하듯이, 그래도 어디 쓸 만한 낱말 하나 찾아 나서다 보면, 저절로 쓸쓸해지기도 하던 시의 저녁 무렵이여, 두 구석이 닮았다. (「구석」부분)

아득한 기억 속으로 사라져가는 풍경처럼, 자신의 시가 점점 시대에서 밀려나는 이발소 같은 자리를 차지할 것임을 예감하는 시인은 ‘시집과 이발소가 닮았다’고 말하며, 시란 대량생산과는 거리가 먼 수공업처럼 시인의 손에 달린 수작업의 산물이며, ‘중앙’보다는 ‘주변’ 혹은 ‘구석’을 노래하는 것이라는 개성적인 시관(詩觀)을 드러낸다.




마음에 새긴 몸의 언어

전통적인 정서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정윤천의 시는 기존의 서정시에 닿아 있다는 점에서 그리 새로워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생활 속에서 길어올린 해학과 구성진 어조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소박한 삶을 감싸안는 서정의 힘을 보여줌으로써 따뜻한 감동을 자아낸다. 그의 시에 더욱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은 ‘몸의 언어’이다. 이 시집에는 몸의 언어를 통해 마음을 헤아려보는 시가 유난히 눈에 띈다.

미안하다//나는 언제 옷 벗어부치고 시 써본 일 없었으니//나탈리 망세. 스무 살의 그 여자가, 벗은 몸으로, 눈부신 대낮 같은 겁 없는 육체의 순간으로, 흠씬 껴안아선, 힘주어선, 사람들 앞에서 악기를 연주할 때, 그녀에게 첼로가 단지 첼로뿐이었으랴. 사랑한다고 감히 주절거려본 적 있었는가. 그 앞에서 제대로 너를 벗어준 적 있었는가.//미안하다/시야. (「시에게 미안하다」 전문)

“옷 벗어부치고 시 써본 일 없었”던 시인은 이제 단지 시뿐임을 넘어선 시를 온몸으로 쓰고자 한다. 화려한 수사를 벗어던진 채 날것 그대로의 질박한 언어로 온몸을 기울여 쓰는 시. “죽어라고 붙들고 늘어져서 애면글면 세공해 보이지 않고도, 아무렴, 무정세월의 뒷골목에선 듯, 건달기 서린 휘파람 소리인 듯, 툭툭 건져 올린 튼실한 속엣말들의 행간과 너비. 그런 ‘풍경의 깊이’, 함지박에다 퍼온 됫박 소금이라도 되는 양 더퍽더퍽 마음에 들려주”(「김사인 詩集」)는 시.

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혼자서 부르며 왔던 어떤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만을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서늘한 열망의 가슴이 바로 사랑이다.//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 속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거기 이 세상을 한꺼번에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과도 같았을, 그런 일순과의 마주침이라면, 이런 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부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리움의 힘으로 가버린 날들을 돌이켜 되살려내는 시인은 그리워하고 기억하는 가슴이 남아 있다면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지나온 시간을 향한 그리움, 시를 향한 시인의 끝없는 열망에 다름 아니다. 시의 맛을 살리기 위해 단어 하나, 쉼표 하나에도 공력을 들이는 정윤천 시인은 이번 시집을 “‘첫 시집’을 삼아도 좋을 초심으로 돌아가, 내 시의 남은 계절들이 다시 한 번 가만히 깊어지기를”(「시인의 말」) 바라는 겸허한 마음을 내비친다.

정윤천 시인은 1960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다. 광주대학교를 졸업하였고, 1990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1991년 『실천문학』 여름호에 신인 작품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흰 길이 떠올랐다』,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 등이 있다. 계간 『시와사람』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현재 제주도의 ‘제주유람선’에서 홍보이사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