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있는風景

[스크랩] 바람길 따라 찾아간 동해안의 아름다운 정자

by 진 란 2007. 2. 28.

 

강원도에는 동해안을 따라 많은 정자가 있다. 아마 강원도처럼 바닷가에 정자가 많은 곳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동해안의 정경 때문이다. 또한 동해안은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며, 백두대간이 한 겨울 바람을 막아주고 있어 내륙보다 기온이 따듯하다는 점도 이곳에 많은 정자를 짓는 환경적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7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고성군, 속초시, 양양군, 강릉시, 동해시, 삼척시에는 과연 어떤 정자들이 주변 절경과 함께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을까? 오늘 바람을 타고 그 길을 따라 해안을 달려본다.

 

천학정(고성) 

 

고성군 교암리에 소재한 천학정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기암괴석의 위에 자리하고 있다. 천학정은 1931년에 한치응(韓致鷹)의 발기로 최순문, 김성운과 함께 건립한 정자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각지붕의 단층 구조로 지어졌다. 천학정은 교암리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 낮은 산을 벗어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작은 산에는 노송이, 밑으로는 기암괴석이 자리하고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고 있다. 오르는 길에 보면 마을에서 시를 적어 계단 양편에 줄지어 진열을 하였으며, 위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면 그 풍광이 가히 일품이다. 천학정은 사시사철 일출이 장관인 곳으로도 유명하다.


남쪽으로는 청간정, 북쪽으로는 능파대가 가까이 있는 이곳은 동해 푸른 바다의 거울 속에 정자가 있다고 하여 천학정(天鶴亭)이라고 하였단다. 하늘에서 학이 내려온다는 뜻인가 보다. 천학정 위로 오르니 동해의 푸른 물이 넘실대고, 2월 초의 찬 바닷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기분이 상쾌해진다. 누가 이곳에 아름다운 정자를 짓고 자연과 벗 삼아 살아왔을까? 옛 선인들의 멋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청간정(고성) 

 

청간정은 관동8경 중 하나요, 설악일출 8경의 하나로 유명하다. 청간정은 일반적인 정자가 밑으로 사람들이 다닐 수 없도록 만들어진 것에 비해, 중층 누각으로 만들어져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청간정은 본래 청간역의 정자였다고 하나 그 창건연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조선시대 중종15년(1520)에 간성군수 최청(崔淸)이 중수한 기록이 있어 정자의 건립은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후 현종 3년(1662)에 최태계가 중수하였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당시 좌상 송시열(宋時烈)이 금강산에 머물다가 이곳에 들려 친필로 '청간정(淸澗亭)'이란 현판을 걸었다.


청간정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에 2층 중층 누각으로 지어졌으며, 1884년인 고종 때 전소되었던 것을 1928년 토성면장 김용집 등의 발의로 현재의 정자를 재건하였다. 1953년 5월 15일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지시로 정자를 보수, 다음 최규하 전 대통령의 순시 때 지시에 의해서 예산을 책정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의 현판은 이대통령의 친필로 게판하여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청간정은 정자를 에워싼 울창한 송림사이로 넘실대는 동해의 파도와 백사장, 기암괴석 주위를 비천하는 철새 떼. 그리고 주변에 군락지를 이루고 있는 산죽이 바람결에 날리는 모습 등 가히 관동팔경 중 일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영랑정(속초)

 

영랑정은 동해와 벗하고 있는 석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영랑호의 범바위 위편에 영랑호와 동해를 바라다보는 자리에 있다. 거대한 바위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영랑정은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 원래는 이곳에는 한국 전쟁 당시 속초지역의 수복에 공이 컸던 11사단장 김병휘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금장대를 건립해 1970년대까지 있었으나 퇴락하고 말았다.


속초시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영랑호에 옛 정자터가 있는데 여기가 영랑 선도들이 감상하며 놀던 곳이다’라는 기록하고 있어 이것을 기반으로 2005년 새로 금장대 터에 신축을 하여 시민공모를 하여 명칭을 영랑정이라고 하였다. 범바위 뒤편으로 영랑정을 오르는 길이 있다. 영랑정을 오르면 시원하게 펼쳐진 영랑호와, 동해. 그리고 설악의 위용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평풍처럼 둘러쳐진 설악과 동해, 그리고 영랑호. 그래서 신라 화랑 영랑이 술랑, 안상, 남랑 등과 함께 금강산 수련을 마치고 이곳을 들렸다가 그 아름다움에 빠져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지 않았을까? 앞으로 보이는 화랑수련장과 화랑공원이 언젠가는 화랑 영랑의 기개를 어린 소년들에게 전해주는 명소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영랑정과 함께 이곳이 우리 선조들의 기개가 되살아나는 곳이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의상대(양양)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8호인 의상대는 낙산사로 들어가 해수관음을 우측에 두고, 보타전 길로 들어가면 동해를 바라다보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바람 부는 날 의상대에 오르면 시원한 동해의 푸른 물이 발아래 펼쳐지고, 암벽에 부딪쳐 흰 포말을 내며 부서지는 동해의 물은 포효하는 한 마리 범의 소리인 듯 거칠다.

 

의상대(義灀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낙산사를 지은 의상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1925년에 만든 정자이다. 원래 이곳은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할 당시 머무르면서 참선을 하였던 곳이라고 하여 정자가 없을 때부터 불린 이름이다. 1936년 폭풍으로 도괴가 되었던 것을 1937년에 재건하였고, 1975년에 중수를 하였다. 6각으로 만들어진 아담한 크기의 의상대는 낙산사에서 홍련암으로 가는 길 해안 언덕에 있어 좋은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의상대의 난간은 비스듬하게 세운 것이 특징이다.  

 

낙산사의 복원이 궁금해 들린 의상대. 홍련암으로 가는 길도 파헤쳐지고 무너져 내린 곳이 있어 보수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의상대 곁에 큰 키를 자랑하는 노송 서너 그루가 뛰어난 풍광을 연출한다. 오랜 시간 암벽 위에서 참선을 하여 깨달음을 얻은 의상대사의 마음을 아는지, 철새 한 무리가 하늘을 나는 것이 도솔천을 오르려는 마음 같아 보인다.

 

하조대(양양) 

 

양양군 현북면에 있는 경승지인 하조대는 그 일대가 암석해안으로 이루어져 있다. 온갖 기암괴석과 바위섬들로 이루어져 주위의 울창한 송림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동해안에서 가장 넓은 은설(銀雪)의 백사장으로 옛 부터 ‘산은 설악이요, 바다는 하조대라.’하여 영동지방의 명승지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하조대(河趙臺)는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로 유명해진 조선의 개국공신 하륜, 조준 두 충신이 고려 말엽 이곳에서 잠시 은거하였다하여 두 사람의 성을 따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이 외에 하씨 집안 총각과 조씨 집안의 두 처녀 사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절한 사연으로 인해 명명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조대는 조선 정종 때 정자를 세웠으나 철폐되었으며, 수차례의 중수를 거쳐 1940년 8각정을 지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던 것을 1955년과 1968년에 각각 재건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98년 해체·복원한 건물로 초익공 굴도리양식의 육모정으로 지붕에 절병통을 얹어 소나무와 함께 주위의 자연경관과 잘 어울리고 있다. 정자각 앞에는 조선 숙종 때 참판 벼슬을 지낸 이세근이 쓴 「하조대」 3자가 암각 된 바위가 있다.

  

기암괴석 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하조대. 동해바다의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돌출된 암반의 정상부에 위치하여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고 있으며, 맞은편 등대에서 바라다보는 하조대의 풍관은 그야말로 천하 일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절경에서 은거를 한 하륜과 조순이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한 웅지의 나래를 편 곳이라 하니 쉽게 발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해운정(강릉)


강릉 선교장을 지나 경포호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9호인 심상진가옥과 돌담을 경계로 보물 제183호인 해운정(海雲亭)이 있다. 해운정은 경포호 서안에 있는 별당형식의 건물로 조선 중종 25년인 1530년에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 선생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것이라 전한다. 어촌 심언광 선생은 중종 2년(1507) 진사가 된 후 부제학, 이조와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문장에 뛰어났었다. 해운정은 초익공양식에 팔작집으로 외부는 소박한 모양을 하였으나, 내부는 비교적 세련된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해운정>이란 현판은 송시열의 글씨이며, 내부에는 권진응, 율곡 이이등 당대의 여러 명사들의 기문과 시문판이 걸려 있다. 건축양식은 3단으로 쌓은 축대 위에 남향으로 지었는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안쪽의 오른쪽 2칸은 대청이며 왼쪽 1칸은 온돌방이다. 대청 앞면에는 문을 달아 모두 열 수 있게 하였으며 건물 주위에는 툇마루를 돌려놓았다.  

 

강릉시 운정동 256번지에 자리한 해운정. 지금은 퇴락하기는 하였지만 경포호를 가까이 하고 노송과 어우러져 있는 해운정의 옛 모습을 그려보면 당대에 견줄만한 정자가 그리 흔치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화려하지 않고 멋을 내며, 기교를 부리지 않고도 품위를 지키는 정자. 그것이 바로 해운정이었다.  

 

경포대(강릉) 

 

강릉에서 북동쪽으로 6km 정도를 가면 해안모래와 만나는 곳에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석호인 경포호가 있고, 호반 서쪽 언덕 위에 유명한 경포대가 있다. 경포호는 옛 부터 시인묵객들이 예찬한 곳으로 호수가 거울처럼 맑다고 하여 일명 경호(鏡湖), 군자호(君子湖)라고 도 부른다.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소개되는 이 호수는 바다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아침 해와 붉게 물드는 석양, 야경으로 보는 호수경치,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백사청송(白沙靑松)과 해당화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고 하니 그 누구라도 이곳에 오르면 시한 수 읊조리지 않으리오. 


경포대(鏡浦臺)는 고려 충숙왕 13년(1326년)에 강원도의 한 관리였던 박숙정이 당시의 인월사 옛터에 세웠던 것을, 조선 중종 3년 (1508년) 강릉부사 한급이 지금의 자리에 옮겨놓았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 끝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경포대 내부에는 숙종의 어제시와 율곡이 10세에 지었다는 경포대부를 비롯해, 조하망의 상량문 등 수많은 명사와 시인묵객의 글이 게시돼 있다. 호수를 바라보는 쪽 누대의 단은 한 단 더 높여 놓았는데 이는 방문객들이 주변의 경치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하기위한 배려일 것으로 보인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철과, 여름 피서를 하기위해 찾았던 경포대. 그러나 2월 초의 따듯한 날씨 속에서 찾은 경포대의 느낌은 또 다르다. 꽃에 파묻힌 경포대는 아름답다고만 느꼈는데 지금은 오히려 웅장함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묵객들은 사시사철 한 정자에 올라 다 다른 느낌의 글을 남기고 간 것일까?

 

 

약천정(동해)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해는 여태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 긴밧츨 언제 갈려 하나니


학교를 다니면서 한번쯤은 암기를 한 기억들도 있을 남구만의 시 ‘동창이 밝았느냐’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약천 남구만선생은 조선 후기(1629(인조 7)~1711(숙종 37))의 문신이다. 당시 서인의 중심인물이었으며, 문장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남구만의 본관은 의령이며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미재(美齋)로 불렀다. 후일 영의정까지 지낸 남구만은 1684년 남인의 기사환국으로 강원도 강릉(현재 동해시 망상해수욕장 부근에 있는 심곡동으로 약천동이라고도 한다)에 서 1년 여 유배생활을 하였다. 동창이 밝았느냐는 약천마을의 농촌 정경을 보고 지은 시조라고하나, 그 이면에는 정치적인 색채가 짙은 시조라고도 한다.


심곡동 약천문화마을 한편에 자리한 약천정(藥泉亭).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노송 사이에 2월 중순의 한낮의 햇볕이 따사로웠는지, 인적 없는 약천정은 그렇게 졸듯 고요함 속에 있다가 나그네를 반기는듯하다. 약천정 뒤로 몇 그루 오죽(烏竹)이 있어 바람에 흔들리고, 정자 안에는 떨어진 솔잎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이 오히려 정겹다. 돌길로 깨끗하게 잘 정돈이 된 오르는 계단만큼이나 약천정도 그렇게 다소곳이 마을 동산 노송 숲속에 자리를 하고 있다. 노송에서 이따금 떨어지는 솔잎과 ‘툭’하고 소리를 내는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이 모든 것이 약천 남구만선생이 이곳을 택한 이유는 아니었을까? 아마 옛 선인들이 정자와 누각을 짓고 그 곳에 올라 시를 읊으며 한세상을 산 것도 이런 풍류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지나는 행인들이 이런 풍류에 취해 시 한수 적어 걸어두고 여정을 재촉한 것도, 모두 이런 아름다운 곳에 정자를 지어 발길을 멈추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오늘 내 시 한수 읊을 그런 풍류가 없음이 심히 안타깝기만 하다.

 

만경대(동해)


동해시 북평동사무소는 동해에서 삼척으로 내려가는 7번국도 우편에 있다. 이 북평동사무소 맞은편으로 길이 있는데, 이 안으로 들어가면 동해와 만나는 막다른 곳을 <갯목>이라고 한다. 갯목이란 갯벌이 시작되는 목(입구)이라는 뜻인지, 혹은 포구가 열리는 목이라는 뜻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곳 갯목을 향해 가다가 보면 좌측에 동해 한가운데 커다란 공룡처럼 웅크리고 있는 시멘트공장이 있다. 공장과 길 가운데 바닷물이 들어와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바다를 매립하여 세운 듯하다. 시멘트 공장 중간쯤에 우측으로 만경대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150m를 올라가라는 표시를 따라 나무로 흙을 받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그 등성이에 정자가 하나 보인다. 만경대(萬景臺). 동해시청에 전화를 걸어 설명을 들었으나 찾기가 쉽지가 않다. 북평동사무소에 들어가 정자 있는 곳을 물으니, 점심시간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 친절히 길을 알려준다. 설명대로 어렵지 않게 찾아온 만경대. 그 위에 오르니 동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러나 그 동해를 바라보기에는 지금은 쉽지가 않다. 커다란 공룡과 같은 시멘트공장이 시야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일 잘 아는 선조님들이 이곳이 이리 변할지는 모르셨나보다.   


구미산 성산봉에 자리한 만경대는 조선조 광해군 5년(1613) 삼척에 사는 신당(新堂) 김공훈이 창건한 정자다. 동해에 있는 정자들이 100여년이 안된 것들이 대부분인데 비해 이 만경대는 40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만경대는 동은 망망대해요, 북으로는 송림에 백사장이 10리에 걸쳐있고, 서편으로는 두타산(頭陀山)의 절경이 펼쳐지며, 절벽 아래로는 전천강이 동해로 흐르니 가히 관동 제일경이라 하는 죽서루와 쌍벽을 이루어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하였다. 그동안 만경대는 고종 9년인 1872년과 1924년 갑자에 걸쳐 두 차례 중건을 하였다. 만경대 안에는 수많은 글들이 걸려있는데 그 중에 1872년 중수 때 한성부윤 이남식이 쓴 <海上名區>라는 현판은 가히 만경대가 얼마나 절경에 자리하고 있었는가를 알려준다. 절경에 자리 잡은 많은 정자들이 만경대라는 이름을 걸었으나 동해의 만경대 역시 그에 뒤지지 않는 절경이었으리라.

 

임해정(삼척) 


구호구호출수로(龜乎龜乎出水路)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라.
약인부녀죄하극(掠人婦女罪何極) 남의 아내를 앗은 죄 얼마나 크냐.
여약패역불출헌(汝若悖逆不出憲) 네 만약 어기어 내 놓지 않으면
입망포략번지끽(入網捕掠燔之喫) 그물을 넣어 잡아 구워 먹으리.


해가사의 창출근거를 보면 삼국유사 기이 제2 수로부인조에 전하는 내용으로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때에 순정공(純貞公)이 명주(지금의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곁에 바위 산봉우리가 있어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둘렀다.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뒤에 철쭉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인 수로가 좌우를 향해 "누구 꽃을 꺾어 올 사람이 없느냐?" 하였다. 모시던 사람들은 그 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침 그 때 한 늙은이가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절벽을 타고 올라가 꽃을 꺾어,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 놓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라는 헌화가(獻花歌)와 함께 부인에게 바쳤다. 일행은 명주를 향해가다가 그 이틀 뒤에 임해정(臨海亭)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문득 바다에서 용이 나타나서 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순정공도 허둥지둥 발을 구르나 계책이 없었다.

 

그 때 또 한 노인이 말하되 ‘옛날 말에 여러 입은 쇠도 녹인다고 하니, 이제 바다 속의 미물인들 어찌 여러 입을 두려워하지 않으리오. 경내의 백성을 모아서 노래를 지어 부르고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공이 말대로 하였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나와 도로 바치었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 일을 물으니 부인이 말하기를 ‘칠보(七寶)로 꾸민 궁전에 음식이 맛이 있고 향기로우며, 깨끗하여 속세의 요리가 아니다.’고 하였다. 부인의 옷에서는 세상에서 일찍이 맡아보지 못한 특이한 향기가 풍기었다. 수로부인은 절세의 미인이라 깊은 산과 큰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들림을 당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로부인의 미모가 얼마나 출중했으면 가는 곳마다 신물(神物)들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취하려 했을까? 아담한 임해정에 올라 동해를 바라다보니, 마침 바람이 부는 날이라서 동해의 작은 파도들이 앞 다투어 밀려든다. 백사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갈매기 떼들은 한 곳을 바라보며 파도가 밀려들어도 요동도 하지 않고 있다. 흡사 당시 막대기로 언덕을 치던 사람들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저 편에 서 있는 추암해수욕장의 촛대바위는 그 때 수로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간 용의 화신은 아닐는지.

 

죽서루(삼척) 


자연을 그대로 이용해 집을 짓는다는 것은 요즈음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건축방법이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 우리 선조들은 자연을 범하지 않고 건물을 지음으로써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는 방법을 택했다.「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지은 다락형식의 집을 말한다. 죽서루는 고려 충렬왕 1년(1275)에 대학자 이승휴 선생이 세웠다. 그 뒤 조선 태종 3년(1403)에 삼척부의 수령인 김효손이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름은 누의 동쪽으로 죽장사라는 절과 이름난 기생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 한다.」고 문화재청 자료에 설명을 하고 있다.

 

죽서루는 절벽 위 암반을 기초석으로 이용해 건물을 지었다. 누 아래의 17개의 기둥 중에서 아홉 개는 자연적인 바위를 그대로 이용을 했다. 하기에 그 기둥의 길이가 다 다르다. 나머지 여덟 개의 기둥은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처음 죽서루를 보는 사람들은 왜 기둥이 그렇게 길이가 다른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선조들의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친환경적인 건물을 지었다는 놀라운 점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죽서루는 자연주의 전통 건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관동제일루>라 하여도 이의를 달수가 없다.  


죽서루의 규모는 앞면 7칸, 옆면 2칸이지만 원래 앞면이 5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가운데 5칸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 칸이고, 후에 증축된 것으로 보이는 양편에 기둥은 그 배열이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죽서루에는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한 여러 유명한 학자들의 글이 걸려 있다. 그 중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현종 3년(1662)에 부사 허목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숙종 37년(1711)에 부사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년(1837)에 이규헌이 쓴 것이다. 이 밖에도 숙종, 정조, 율곡 이이선생 등 많은 분들의 시가 누각 안에 걸려 있다.

 

 

파이 서비스가 종료되어
더이상 콘텐츠를 노출 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보기


많은 정자들을 고성,속초, 양양, 강릉, 동해, 삼척을 지나면서 만날 수 있다.

 

바람길 따라 달려간 동해안, 그리고 그 해안을 따라 절경마다 자리를 잡고 수많은 시인과 묵객들을 유혹하던 아름다운 정자들. 이제 그 정취에 취한 후대 사람들의 발길은 그렇게 이어지고, 앞으로 긴 시간동안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이곳의 풍광을 노래할 것이다. 

출처 : 누리의 취재노트
글쓴이 : 온누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