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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風景

나는 진짜 행복합니다

by 진 란 2006. 12. 23.

                      

                       나는 진짜 행복합니다

 

                                                   박경철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풍산의 어느 작은 마을이 벌컥 뒤집히는 사건이 있었다. 산에서 버섯을 따다 팔아서 생활하는 마을 아주머니 한 분이 모처럼 귀한 버섯을 따는 바람에 시장에 내다 팔지 않고 동네 사람들에게 조금씩 팔았다. 그 버섯을 산 사람들 중에는 이장댁도 있었고, 부녀회장 집도 있었고, 혼자 사는 노인 댁도 있었다.

 

   그 중에서 사람 좋기로 소문난 이장댁은 그 버섯으로 버섯전골을 한냄비 가득 끓여 이웃들을 초대했다. 열댓 명이 평상에 모여 앉아,  모깃불을 피워놓고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동안 이장댁은 고깃국물이 펄펄 끓기 시작하는 냄비에 버섯을 쭉쭉 찢어 넣고는 우선 마당으로 밥상부터 날랐다. 이웃들의 웃음과 정담들이 살갑게 오가는 동안, 풍성하게 차려진 밥상 위로 전골 냄비가 올려지자 누가 퍼주고 말고 할 겨를도 없이 각자 서로 국자를 들고 자신의 국그릇에 전골을 퍼 담았다.

 

   이장댁은 이마에 땀을 닦으면서, "아이구, 살살 잡숴. 그러다 입천장 다 벗겨지겠구먼! 간이 잘 봐졌나 모르겠네. 안 짜려나? 아까 조선간장을 너무 많이 친 것 같은데......" 하고 가벼운 농을 친 다음, 그제야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 순간 혀끝이 마비되고 코로는 뜨거운 김이 나오는 듯하더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주변을 돌아보니 이미 몇 사람은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입 안으로 흘려 넣고 있었다. 이장댁은 자기 앞으로 국물을 퍼가는 손들을 말리기 위해 냄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맨발로 집 밖으로 달려 나갔다.

 

   갑작스럽게 뜨거운 냄비를 들고 마당을 가로질러 길거리로 달려 나가는 이장댁을 본 사람들은 당황했다. 이유를 알 겨를도 없이 몇몇 사람들이 뒤를 따라 뛰었다. 그런데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 중에 먼저 버섯을 그릇에 담은 남자들이 '픽' 하고 쓰러졌다. 집에서 몇백 미터나 떨어진 초등학교 마당에까지 달려와서 그 국을 운동장에 쏟아버리는 이장댁을 보고 뒤따라온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아이고, 형님 와 이라능교? 이 아까운 국을 와 이래 다 내버리능교?"

 

   "아이구, 이 사람아. 이거 독버섯이데이! 이거 먹으면 죽는데이! 이거 먹으면 죽는데이!"

 

   사람들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다들 황급히 집으로 돌아와 보니 남자들은 토사물을 쏟아내며 마당에 뒹굴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날 초대받지 않았던 건넛집 부녀회장 댁도, 또 그 너머 할머니도, 무려 다섯 집이나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수십 년을 평화롭게 살아온 풍산의 어느 작은 마을은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나고, 방송국 카메라와 신문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장댁은 소중한 큰아들을 잃었다. 남편은 겨우 목숨을 구했지만, 그길로 10년을 자리에 누웠고, 마을에서는 한날한시에 몇 집에서 동시에 상여가 나갔다. 그래도 이장댁을 비롯한 동네 사람들은 버섯을 판 아주머니를 구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어차피 한동네 한식구들인데 아무도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애통하고 원통했지만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이장댁은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인 막내아들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을 바라보며 살았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남편을 볼 때마다 자신이 죄인인 것 같아 고개를 들지 못했지만, 그래도 남은 자식들을 위해서 살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내외에게 견딜 수 없는 또 다른 시련이 불어 닥쳤다. 학교에서 아들이 아이들의 다툼에 휘말려 여러 명이 해대는 발길질에 그만 목뼈를 다쳤던 것이다. 경추골절이었다. 이장댁은 넋이 나갔고 이장은 충격을 받았다.

 

   이장댁은 농사도 집안일도 남편수발도 모두 제쳐두고 아이를 업고 대구로, 서울로, 좋다는 병원은 물론 용하다는 한의원과 침쟁이를 모두 찾아다녔다. 논이며 밭이며 가진 재산들이 하나하나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버는 사람도 없이 아이 하나 살려보려고 모든 가산을 탕진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아이는 아버지와 나란히 한방에 눕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안방에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남편이, 왼쪽에는 아들이 반신불수로 누워 있는 기막힌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장댁은 그나마 남은 텃밭에서 나는 채소를 내다 팔아서 생계를 이어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딸아이는 아들을, 이장댁은 남편을 씻기고 닦인 다음 각자 밥을 떠먹여야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란히 누운 사이에 죽과 물, 과자를 그릇에 담아 떠다놓고 딸아이는 학교로 이장댁은 농공단지의 사출공장으로 일을 나갔다.

 

   그러면 그나마 온몸이 뒤틀려 있긴 하지만, 아들이 손목 사이에 숟가락을 끼워 아버지에게 죽을 떠먹이고 자신은 그릇에 입을 대고 죽을 빨아 먹었다. 모녀가 집에 돌아와 보면 온 집 안에  대소변 냄새가 진동을 했다. 두 사람은 다시 대야에 물을 떠다가 남편과 동생을 씻기고 밥을 먹이고, 그렇게 하루를 겨우겨우 살았다. 

 

   이장댁의 생에 다가올 불행이 이것이 전부라면 그나마 천만다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더 가혹하고 무서운 불행이 먹장구름처럼 이장댁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모녀가 서서히 지쳐갈 무렵, 결국 아들의 사고에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아저씨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그해 겨울에 눈을 감았다. 남들은 하기 좋은 말로 "산 사람이라도 살게 차라리 잘 가셨다." 라고 했는지 몰라도 이장댁의 가슴은 이제 더 이상 태울 숯덩어리조차 하나 남지 않았다. 그녀는 상여에 얹혀 떠나는 아저씨의 혼백을 끌어안고 사흘 밤낮 동안 꺼억꺼억 울기만 했다.

 

   아버지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아들에게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하루를 같이 보내며 위로를 주고받던 아들이 아버지가 죽자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의 행동은 점점 더 이상해졌다. 총명하던 아이가 하루 종일 이상한 소리를 하고 대소변에 대한 집착이나 혐오가 짙어졌다. 때로는 자기 손가락을 아예 없애기라도 하려는 듯이 이로 열 손가락을 물어뜯거나 입술을 깨물어 피를 줄줄 흘리기도 했고, 때로는 머리를 땅바닥이나 벽에 쾅쾅 찢는 바람에 방바닥과 벽면을 전부 스티로폼으로 깔아야 했다. 이제 식구들이 전부 미쳐나가거나 아니면 전부 죽기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나마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이장댁을 붙들어준 유일한 힘은 신앙심이었다. 이장댁은 삶이 몸서리쳐지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성당을 찾아가 기도했다. 그러나 간절히 애원하는 이장댁의 기도에 하늘은 응답이 없었고 아들의 상태는 점점 나빠져 갔다. 그런데 원래 말수가 적었던 딸이 하느님께 자신을 봉원하겠다는 결심을 내렸다. 원래 신앙심이 깊었던 딸은 성년에 접어들면서 자신이 겪어야 했던 일에 대해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늘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아버지와 동생을 위해 하는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장댁은 딸의 수녀원행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혹시 딸의 흉중에 집안에 일어난 일련의 일에 대한 보속의 의미나 희생의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설명하기 어려운 집안의 우환들을 막아보기 위해 신에게 귀의한다면 그것은 더욱이 잘못된 일이었다. 혹은 사는 게 힘들어서라면, 그것이 응답하지 않는 기도에 지친 것이라면 필시 말려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딸아이의 마음을 돌려세우지 못했다. 딸이 수녀원에 들어가기 전날 모녀는 밤새 붙들고 울었다. 수녀원에 들어가는 딸은 남겨진 어머니와 동생을 버려두고 떠나는 인간적 정리가 아파서 울고, 이장댁은 혹여 자신의 잘못이 하나뿐인 딸을 수녀원으로 몰아낸 것은 아닐까 싶어 눈물이 났다. 결국 집에는 어머니와 아들 두 사람이 남겨졌지만 이것 역시 불행의 끝은 아니었다.

 

   원래 아주머니는 오래전부터 우리 진료실을 종종 찾았다. 늘 미소를 짓는 아주머니는 병원에 오실 때마다 어떤 작은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오셨는데, 내가 우연히 "이 아이가 친손자세요? 외손자세요? 아이 엄마가 멀리 사나보죠?" 하고 물었다가, 아예 오전 진료를 전폐하고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이 사연을 듣게 된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입을 빌려 "네가 지은 크고 작은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바로 태어난 죄다." 라고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기독교식으로 보면 어차피 인간은 모두 죄를 안고 태어난 셈이고, 불교식으로 보아도 현생은 전생에서 지은 업으로 고스란히 훈습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회개를, 불가에서는 수행을 통해 죄(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주머니의 삶도 그랬을까? 아주머니의 삶도 끝없는 고행 중에 이어지는 보속이었을까?

 

 

 

   수녀원에 들어간 딸이 일 년 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들어 집으로 돌아왔다. 수녀원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딸을 바라보는 이장댁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이제 더 이상 정을 붙일 데도 마음을 둘 데도 희망을 걸 데도 없었다. 남편은 죽고, 아들은 불구가 되고, 하나 남은 딸은 하느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희망마저 빼앗겼다.  

 

   한 인간의 삶에서 이렇게 철저히 무너지는 삶을 찾을 수 있을까? 아주머니의 삶은 마치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오는 것처럼 한순간에 붕괴되었지만, 아주머니에게는 최소한 자신을 소생할 만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펑펑 울었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하게, 혹은 편안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들려주는 아주머니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는 내게 말했다.

 

   "사람들은 대개 죽는 사람들을 보고 와 죽노 카지예. 그렇지만 사실 산 사람들한테 와 사노 카고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꺼?"

 

   그랬다. 우리는 우리가 왜 살아가는지 모르면서 똥물 속의 구더기처럼 생을 부여잡고 꼬물거리며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주머니의 말은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깊은 경지의 사색을 담고 있었다.

 

   수녀원에서 돌아온 딸과, 반신불수의 아들과 함께 이장댁의 삶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장댁은 밤이면 딸이 원인 모를 병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아파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낮에는 겨우 팔만 움직이며 몇 마디의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만 토해내는 아들을 보살펴야 했다. 이 모든 일이 자신이 지은 죄다 싶어 참고 참아내던 의지도 조금씩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집 안에는 침묵이 흘렀고 세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웃집 김씨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작년에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며느리마저 집을 나가버린 터라 할머니 혼자서 두 살배기 손자를 키우며 살고 있었는데 그만 간밤에 돌아가신 것이다. 할머니는 그렇다 치고 홀로 남겨진 어린아이가 큰일이었다. 그 아이를 맡아줄 일가붙이들은 나 몰라라 했고, 그렇다고 도망간 아이 엄마가 다시 나타날 리도 만무했다. 아이는 고아원으로 가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할머니 상가에 다녀온 후로 어린아이 얼굴이 이장댁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상가 마당을 이리저리 기어 다니던 어린 아이의 모습......, 그러고 보니 어쩌면 그 아이도 태어난 게 죄일지도 몰랐다. 이장댁은 어린아이의 운명을 생각하자 목이 메어 잠들 수가 없었다.

 

   어두운 밤, 밤새 바람에 떠는 문풍지 소리처럼 아들의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땀방울이 고통에 신음하는 딸의 이마를 적시는 동안 이장댁은 어둠 속에서 잠든 두 자식의 얼굴을 내려다 보며 밤새 어린아이의 얼굴을 붙들고 있었다. 다음날 딸과 상의한 끝에 모녀는 아이를 거두기로 결심했고 데려다가 정성들여 키우기 시작했다. 이장댁은 낮에 일을 나가고, 딸은 동생과 어린아이 둘을 같이 돌보면서 그해를 살아갔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생겼다. 어린아이를 데려다 키우면서 그렇게 이유를 찾지 못해 애를 먹던 딸아이의 통증이 서서히 사라져간 것이다. 마치 카잔챠스키의 <그리스도 다시 못 박히다>의 주인공 마놀리우스처럼 딸아이의 몸이 기적처럼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새 어느덧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아이를 입양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아이를 데려가는 사람에게 "잘 키워주세요." 곱게 키워주세요. 많이 사랑해주세요." 라며 몇 번이나 당부했다. 모녀는 눈물로 아이를 떠나보냈지만, 어린아이와의 짧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깊은 치유의 은혜가 베풀어졌음을 깨달았다.

 

   세 사람은 그길로 정든 시골마을을 떠났다. 익숙한 성당의 친절한 교우들과, 늘 자신들을 안쓰럽게 보살펴준 많은 이웃들을 떠나 안동 시내로 이사를 했다. 이사 후 이장댁은 주물공장을 다니고, 건강을 회복한 딸아이는 어떤 자선단체의 복지관에서 근무를 하게 되면서 살림살이는 세 사람이 먹고 살기에 충분할 만큼 넉넉해졌다.

 

   아들도 장애인시설에 보냈다. 두 사람의 급여로 아들의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의 지능이 겨우 7,8세 수준에서 머무르긴 했지만그래도 재활 치료는 필요했다. 그러나 신은 그것마저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시설에 보내진 아들은 한 달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모녀의 충만한 가슴에 그 정도의 시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아이를 재활원에 보내고 싶었지만 여건이 허락지 않아 늘 걸려 했는데, 차라리 집에서 돌보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모녀는 마치 면죄부를 받은 양 행복해했다.

 

   이장댁은 어렵사리 얻은 일자리를 그만두고 다시 아들을 돌보면서 인근 빌딩의 청소일을 시작했다. 아침상과 점심상을 차려주고, 저녁에 목욕시키는 것을 제외하면, 아들은 혼자서 테레비전을 보고 어린아이들이 읽는 만화책을 읽기도 했기 때문에 중간에 짬을 낼 수 있었다. 그렇게 가정이 안정되어가는 중에 이장댁의 눈에 또 다른 버려진 아이가 눈에 띄었다. 이장댁은 그 아이들을 거두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하나둘 늘어나면 성당으로 이웃으로 다니며 입양을 부탁했고, 성당의 교우들과 신부.수녀님들도 입양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렇게 데려다 키우다가 떠나보낸 아이가 열 명이 넘었다.

 

   그 중 한 아이가 문제였다. 세 살 된 남자아이였는데 이 아이는 손가락이 하나가 더 많은데다 얼굴의 생김새도 약간 이상했고 지능도 떨어졌다. 성한 아이들도 입양이 어려운 터라 이 아이의 입양은 꿈도 꾸지 못했다. 어느 새 훌쩍 나이를 먹어 여덟 살이 된 아이, 특수학교를 가기에도 난감한 아이, 부모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아이, 호적이 없어 학교도 보낼 수 없는 아이, 그렇다고 시설에 보내기에는 너무나 가슴이 아픈 아이.

 

   모녀는 며칠 밤낮을 고민하다가 우리로서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아직 시집도 안 간 딸아이의 앞으로 아이를 입적시키기로 한 것이다. 나중에 아이가 커서 할머니 나이인 이장댁의 호적에 아들로 등재된 것을 보고 주워온 아이라고 마음 상해할까봐, 차라리 아버지는 없지만 엄마는 있는 아이로 만들어주기 위해 딸의 호적에 아들로 입적시킨 것이다. 그때부터 아이는 이장댁의 손자가 되고 딸의 아들이 되었다.   

 

 
 
   아주머니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나는 가슴이 너무 뻐근해서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내가 움켜쥐고 사는 그 모든 것들이, 또 욕망으로 가득했던 지난 삶들이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아주머니의 눈은 부드럽고 편안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마치 법당에 모셔진 보살상처럼 은은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정말 희안하게도 당사자는 웃고 듣는 이는 울었다. 아주머니는 지난 삶을 고통이 아닌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였다. 그분에게 아들, 딸 그리고 손자는 모두 희망일 뿐 절망이 아니었다.
 
   "원장님요, 사람들은 죽어서 천당엘 갈라꼬 애들을 많이 쓰지예. 하지만 살아서 천당을 만들지 못하면 죽어서 천당은 없답니다. 그저 오늘이, 여기가 천당이거니 하고 살아야 안 되겠는교. 원장님은 내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웃으니까 이상하지요? 저 할망구가 돌았나 싶지요? 그런데 나는 진짜 행복합니다.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능 기 감사하고, 내가 그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기 또 감사하고, 내 자식 남의 자식칼 거 없이 내 곁에서 돌볼 수 있어 감사하고...... 그래서 노상 웃고 다니지예. 안 웃을라꼬 해도 너무 좋아서 자꾸 웃어지지예."
 
   아주머니는 이야기를 끝내고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료실을 빠져나가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무엇인가에 도취된 사람처럼, 영혼이라도 빼앗긴 사람처럼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이 느낌을 어쩔 줄 몰라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난주에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전하기를, 아주머니가 몇 년째 쌀이나 부식을 모아다가 노인들이나 불쌍한 사람들 집 앞에 놓아두고 가는데, 그것도 캄캄한 밤에 아무도 몰래 그 일을 계속해오다가 얼마 전에 그 사실이 알려졌다는 것이다. 그후 아주머니는 동네 주민들과 태화동 성당의 교우들로부터 많은 존경과사랑을 받으며, 신부님의 요청으로 가끔 자신의 아픈 경험을 신자들에게 들려주기도 한다고 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시청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는데, 아주머니는 내게 그런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사람이  산다는 것을, 희망과 절망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서로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 박경철의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두번째 이야기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