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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風景

[스크랩] 여자, 정혜 (바람이 분다/ 이소라)

by 진 란 2005. 3. 15.
여자, 정혜









결국 영화는, 낯선 누군가가 또 다른 낯선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다. 세상은 살아갈수록 외롭고, 늘 친근하던 얼굴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낯설어진다. 삶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상처를 남긴다. 그래, 랭보의 시를 떠올릴 필요도 없이,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상처는 곪아 터지면서 당신을 치명적 상태로 빠트릴 수도 있지만, 그러나 단단한 보석으로 빛나게 변신시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주공 아파트에 혼자 사는 29살 정혜라는 여자에 대해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다. 홈쇼핑으로 주문해서 사들인 이런 저런 물건들이 놓여 있는 집 안에서, 그녀는 알람시계에 맞춰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혼자서 밥을 먹고, 지하철에서 흔들리며 직장인 우체국으로 향하는 그녀는 우리 주변의 사소한 인물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소포의 무게를 재고 우표를 붙이는 업무는 늘 반복되는 그녀의 일상사이다.

일요일 오후, 정혜가 아파트 화단에서 주워 온 고양이와 발장난을 하고 있을 때 베란다 너머에서 동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그 나른한 행복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일상 속에서 그녀의 아픈 기억들이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른다. 깨어진 사금파리 조각처럼 일상 속에 박혀 있는 과거의 상처들은 이따금, 혹은 불현듯, 그녀의 평범한 일상과 교차된다.

병문안을 가기 위해 병실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1년 전 엄마의 죽음을 기억해낸다. 유년시절, 엄마는 한 손에 연필을 들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항상 담배가 들려 있었다. 그녀가 의지할 유일한 나무였던 엄마의 죽음. 구두에 묻은 얼룩을 보고 그녀는 신혼여행지에서 첫날밤을 치르다가 그냥 돌아와 버린 기억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15살 여름의 그 치명적 상처가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 상처들은 구두에 묻은 얼룩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고, 그녀의 삶 속에 잠복해 있다. 늘 의식하지는 않지만 그녀의 삶과 평생 분리될 수 없는 상처들이다. 누가 그녀의 평온한 얼굴 뒤에 그런 상처가 깃들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겠는가. 그러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사랑이다. 삶은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견딜만하다.

우체국에 자주 들리는 한 남자가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소설가 지망생인 그 남자를 바라볼 때마다 정혜의 눈빛이 흔들린다. 어느 날 그녀는 그를 따라 나가 용기를 내서 말한다. [오늘 저녁, 우리 집에 식사하러 오지 않을래요?] 갑자기 초대를 받은 남자는 당황한다. 그에게는 그날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갈 수 없다고 말하는 그의 대답에 실망한 그녀가 몸을 돌리자, 그때서야 남자는 가겠다고 다시 대답한다.

[여자, 정혜]에서 돋보이는 것은 정교하게 구축된 정혜라는 캐릭터이다. 부서지기 쉬운 봄날의 유리햇볕처럼, 투명하면서도 연약하고 그렇지만 질긴 생명력이 그 안에는 깃들어 있다. 담담하게 전개되는 일상의 이야기들 사이로 들추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들이 파편화된 채 떠오른다. 이렇게 섬세하게 여성의 감정선을 묘사하는 감독이 남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여자, 정혜]의 정혜는 생생하게 우리들 영혼 속으로 파고든다.

지난 해 부산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되어 대상(뉴커런츠상)을 수상한 이윤기 감독의 [여자, 정혜]는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8억원의 저예산 영화다. 올 1월 선댄스 영화제에 초청되어 관객들로부터 [이런 영화를 만들어줘서 감사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그렇게 말을 꺼낸 중년의 여인은 끝내 울컥 눈물을 쏟아내 [여자, 정혜]의 이야기가 보편적 공감대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2월에는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일상 속에 잠복한 상처와 그 치유과정을 그린 [여자, 정혜]의 또 다른 발견은, 정혜 역의 김지수다. TV 드라마 [보고 또 보고]의 평범한 연기자로만 기억되던 그녀는, 정혜 역을 섬세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정혜가 일상에서 느끼는 사소한 감정들의 무늬는 물론 지우기 힘든 옛 상처가 떠오를 때의, 즉 수면 위와 아래의 모습들이 교차될 때의 섬세한 질감 표현은 아주 뛰어나다.

그리고 이윤기 감독은 피사체 1미터 앞에서 항상 카메라를 움직인다. 들고 찍기가 역동적 질감을 부여하며 다이내믹한, 혹은 불안한, 인물의 심리묘사에 흔히 사용된 기법이라고만 생각했다면, [여자, 정혜]에서 새로운 의미로 사용된 들고 찍기의 효과에 대해 우리는 논의할 필요가 있다. 칸느 황금종려상 수상작이기도 한 라스 폰 트리에의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처럼 [여자, 정혜]의 들고 찍는 화면은 조금씩 파도치는 정혜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처음 시작했던 문장을 수정해야 한다. 세상은 살아갈수록 따뜻하고 늘 낯선 얼굴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낯익어진다. 삶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부여한다. [여자, 정혜]는 그 사소한, 그러나 너무나 소중한, 소통의 작은 시작이다.



글/하재봉


출처 : 달래산방
글쓴이 : 진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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