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배려
우리는 내 의견은 옳고 틀리지 않다고 믿으며,
상대의 의견을 보충하고 싶어하는 견(見)의 욕망에 지배당하기 쉽다.
만일 상대방에게 충고하고 싶어지면 냉정하게
'지금 나는 상대에게 내 의견을 강요하려는 것은 아닐까?'
'견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그 배경에 있는 진심을 헤아려 봐야 한다.
자기 안의 견(見)과 만(慢)에 지배되지 않도록 항상 스스로를 냉정하게 돌아보고,
재빨리 상대의 고통을 알아차리는 것이 배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 코이케 류노스케의《생각 버리기 연습》중에서 -
*만(慢)
타인에 대하여 마음이 앙양되는 것. 스스로 앙양되는 것. 마비달마에서는 마음의 작용중 부정법(不定法)의 하나. 만심(慢心 : 자만심). 자기자신은 타인보다도 훌륭하다고 망상하고 타인에 대하여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의 자만임
*견(見) 지식·지혜 습득의 첫 단추…있는 그대로 보아야
S: dr.s.t.i, darśana P: dit.t.hi T: lta ba, mthong ba E: to see Cs: 達利瑟致
우리말에 ‘제 눈에 안경’이란 말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잘것없는 물건이더라도 보는 이의 마음에 들면 좋게 보인다는 말이다. 곧 사람들이 똑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은 제각각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본다’는 것이 그 자체에 그치지 않고 그 대상에 대한 가치 판단과 이어지는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정견(正見)을 강조한다. 우리말 ‘보다’가 폭넓은 의미를 갖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단순히 눈의 작용으로서 뿐만 아니라 ‘알다’ ‘이해하다’ 또는 입장을 나타내는 ‘견해’ ‘사상’ ‘주의’ ‘주장’ 등의 의미도 아우른다.
dr.s.t.i 그리고 darśana, paśyati
견(見)에 상응하는 산스끄리뜨는 대표적으로 드르쉬띠(dr.s.t.i)이다. ‘보다’ ‘주목하다’ ‘발견하다’ 등의 의미를 갖는 √dr.ś로부터 나온 여성형 명사로, 곧 ‘~을 보는 것’ ‘~을 주시하는 것’ 등의 의미가 된다. 곧 눈에 의해 보거나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에 대해 일정한 견해를 내는 것이 된다.
이와 유사한 말로 다르샤나(darśana)와 빠쉬야띠(paśyati)가 있다. 주로 ‘관찰’로 한역되는 다르샤나는 정신적 통찰이나 분별의 의미를 갖으며, 3인칭 단수동사 빠쉬야띠는 ‘보다’ ‘응시하다’ ‘지각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이에 반해 드르쉬띠는 부분적이거나 편파적·제한적 관점의 의미를 갖는다. 악견(惡見), 애견(愛見) 등이 이에 해당한다.
견(見)에 대해 《대비바사론》95권(T27-489c21)에서는 네 가지와 두 가지로 그 의미를 세분한다. 취해야 할 대상을 보기 때문에 응시[觀視], 취해야 할 대상에 대해 결정하기 때문에 판단[決度], 자신의 대상에 대해 견고하게 치우쳐 고집하고 성도(聖道)의 칼날을 포기해 버리기 때문에 완고한 집착[堅執], 바늘이 진흙에 들어가는 것처럼 연(緣)해야 할 것에 대해 날카롭게 들어가기 때문에 깊은 침투[深入]의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또 자세히 보기 때문에 조촉(照囑), 궁구하기 때문에 추구(推求)의 의미도 말한다.
견의 종류
불교 교학상 견은 법수에 따라 2견, 5견, 7견, 8견, 10견 등이 있으며, 외도의 견해로 4견과 62견을 말한다. 이것들은 추탁(推度)의 의미와 관계한다.
①있다고 주장하는 유견(有見)과 없다고 주장하는 무견(無見), 그리고 몸과 마음의 상주를 집착하는 상견(常見)과 그 단멸을 집착하는 단견(斷見)이 2견이다.
②5견은 곧 5리사(五利使)로 근본번뇌 가운데 5가지 악견이다. 아뜨만의 존재가 있다고 주장하는 유신견(有身見), 극단의 한쪽에 치우쳐 주장하는 변집견(邊執見),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는 사견(邪見), 잘못된 착오로 발생한 견해가 진실하다고 주장하는 견취견(見取見), 부정확한 계율과 금제 등을 보고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계행이라고 주장하는 계금취견(戒禁取見)이 그것이다. 이 5가지는 염오한 견해[染汚見]이자 바르지 않은 견해[不正見]로, 《대비바사론》에서 말한 두 가지 또는 네 가지 의미에 상응하기 때문에 ‘견’이라 한다.
③7견은 사견(邪見), 아견(我見), 단견(斷見), 상견(常見), 계금취견(戒禁取見, 戒盜見), 바르지 못한 행위에 의해 얻은 결과를 바른 것이라 여기고 집착하는 과도견(果盜見), 진리를 의심하는 의견(疑見)이다. 이 가운데 일부는 5견과 중첩되기도 한다.
④《구사론》2권(T29-10c08)에서는 여덟 가지로 견을 구분한다. 곧 앞의 5견에다 세간의 정견[世間正見]·유학위의 정견[有學正見]·무학위의 정견[無學正見]을 더한 것이다. 세간의 정견이란 생득혜·문혜·사혜·수혜 등의 유루(有漏)의 혜(慧), 유학위의 정견은 유학위에 있는 자의 각종 무루(無漏)의 견해, 무학위의 정견은 무학위에 있는 자의 각종 무루의 견해이다. 이것들은 모두 혜(慧)를 본질로 한다고 하는데, 자세히 생각한 뒤에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⑤10견은 10수면(十隨眠)을 말한다. 6가지 근본번뇌 가운데 견수면(見隨眠)을 5가지로 세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성질이 날랜 5리사(五利使) 곧 5견은 앞서 말한 바와 같고, 상대적으로 성질이 무딘 5둔사(五鈍使)는 탐견(貪見)·진견(瞋見)·치견(癡見)·만견(慢見)·의견(疑見)으로서, 이것들 모두를 10견이라 한다.
이외에 외도의 주장을 총망라한 비불교적 견해를 지칭하는 것으로 4견과 62견이 있다. 세계는 상주한다, 세계는 무상하다, 세계는 상주하면서 무상하다, 세계는 상주하지도 무상하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처럼 4구분별로 분류한 것이 4견이다. 또한 사인사과(邪因邪果), 무인유과(無因有果), 유인무과(有因無果), 무인무과(無因無果)를 4견이라고도 한다. 62견은 붓다 생존 당시 상주론, 단멸론, 회의론, 무인론 등 다양한 주장을 펼친 외도들의 견해를 정리한 것으로, 10견 또는 35견으로 축약하기도 한다.
무엇이 보는가?
그렇다면 그 기능인 ‘보다’는 것의 행위주체는 무엇인가? 이 문제는 주장자의 관점에 따라 분분하지만, 그 주장이 중점을 보면 상충을 벗어날 수 있다.
첫째는 근견가(根見家)이다. 바수미뜨라(Vasumitra, 世友)를 필두로 유부에서는 눈이 대상을 취해 관조하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눈[眼根]이 본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응시의 관점에서이다.
둘째는 다르마뜨라따(Dharmatrāta, 法救)와 대중부, 《성실론》에서 주장하는 식견가(識見家)이다. 그들은 안근이 아닌 안식(眼識)이 대상을 본다고 말한다. 이것은 판단의 관점에서이다.
셋째는 고샤(Ghoṣa, 妙音)가 제기한 안식과 상응하는 혜(慧)가 대상을 본다는 것이다. 이것도 판단의 관점에서이다.
넷째는 대승에서 주장한 근(根)과 식(識)이 화합해 본다는 것이다. 특히 비유자(譬喩者)는 안식과 동시의 심과 심소법들이 화합해 보게 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것은 응시와 판단의 관점을 다 포함한다.
다섯째는 유식에서 제시한 견분(見分)이다. 8식의 심왕과 심소법이 대상을 연[能緣]하는 행상이 그것으로, 여기서는 응시의 관점에 해당한다.
김영석/불교저널 기자
오만과 겸손
만(慢)자는 오만(傲慢), 자만(自慢), 교만(憍慢), 거만(倨慢) 등과 같이 앞 글자를 바꿈에 따라 다양한 심리상태를 표현하는데, 모두 만(慢)자를 근본으로 해서 상황에 따라 표현하는 의미가 다르게 쓰여지고 있다.
오만의 상대되는 말은 겸손이다. 오만과 겸손은 어떻게 다를까?
사람이 오만하고 싶어서 오만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어서 좋고 나쁜 것이 분명하고, 옳고 그른 것도 분명한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 번 옳다고 생각한 것은 끝까지 옳다고 주장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으니 옆에 사람이 보기에는 만자(慢字)가 아주 단단히 붙은 사람으로 비춰진다.
앞 글자가 무엇이냐에 따라 그 느낌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예를 들어보면,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천국에 가고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 ‘한국아이가 한국말을 해야지 못하면 되느냐?’ ‘한국사람이 한국사람과 결혼해야 되는 것 아니냐?’ 등등 다양하다.
이러한 경우, 말하는 사람은 옳은 말을 하는 것이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불편한 심기를 갖게 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더욱 심각하게 어려운 것은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두 사람이 이해관계에 얽혀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다투기 시작하여 법정까지 가야 하는 경우들이다. 당사자들은 당사자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이 미치는 영향은 결코 당사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겸손이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말과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인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저 분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니 나는 저 분을 잘 위해드려야 한다.’는 이타심(利他心)이 있는 마음이다. 이타심이 있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이다. ‘네가 좋다면 나도 좋고, 네가 싫다면 나도 싫다.’이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끼리도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개 내 생각만이 옳다고 하지 않기에 대화가 가능하고 합의점을 찾기가 보다 수월하기에 해결방법이 이분법에서 오는 투쟁적일 수는 없다. 투쟁적이 아닌 것이 평화이고, 평화 속에서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두 사람의 자유와 평화는 그 두 사람의 세계가 평화롭게 되는 원천이 된다.
종교의 가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타심을 가지게 하여 자유와 평화를 얻게 하는데 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심할 때 교만이 일어나고, 교만은 가정, 사회, 종교의 가치를 상실케 하는 주요한 원인이 될 수 있다. 겸손이야 말로 교만을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약이다.
불교에서는 반야심경에서 ‘물질은 공(空)과 다르지 않으며, 공은 물질과 다르지 않다.’고 하여 이분법적인 사고를 부정하고 있다. 이분법에서는 물질은 물질이고 공은 공일 수밖에 없지만 불교에서는 물질이 공할 수도 있고, 공이 물질이 될 수도 있다고 하여 현상계를 초월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현대과학에서 물질은 빛으로 화하고, 빛이 엉겨 물질이 된다고 했으니 과학적으로도 이치에 맞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종교적인 의미로 100% 옳은 것도 없고 100% 그른 것도 없다는 것을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너무 지나치게 옳은 것을 주장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른 것이 될 수 있고, 그 반대도 성립될 수 있으니 한편에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오늘 옳은 것이 내일 틀릴 수도 있고, 어제 틀린 것이 오늘 맞을 수도 있다. 또 오늘 부자가 내일 가난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어제 가난한 사람이 오늘 부자가 될 수도 있으니 매사를 순간순간 주의 깊게 봐야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의 이해관계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이미 맹인(盲人)아닌 맹인이 된 사람이라 사정을 바르게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져 버렸기에 이런 사람들과 대화하기는 무척 어려운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대방을 위해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유보적인 마음을 갖는 것은 가정과 사회 그리고 종교단체에 자유와 평화를 가져올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우리 한인사회에도 자유와 권리, 즉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누리게 되었다. 이 민주주의에서는 자기중심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의 자유와 인권도 보장되어있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평등은 전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후자에 있다고 생각되는데 불행히도 전자에 치우치는 경향이 심한 것 같다.
겸손한 마음, 상대방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 지속가능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평등사회를 가꾸어 갈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한다.
요즈음 시카고 한인회와 문화회관 건립추진위원회 간에 의견을 달리하는 불협화음을 들으면서 노파심에서 한 말씀드린다.
-대한불교 조계종 시카고 불타사 주지 현성
凡事에 留人情이면 後來에 好相見이니라.
범사 유인정 후래 호상견
"모든 일에 인자스럽고 따뜻한 정을 남겨두면 뒷날 만났을 때 좋은 낯으로 서로 보게 되느니라."
凡事留人情, 後來好相見
매사에 인정을 남겨두면 훗날 좋은 얼굴로 다시 만날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차마 말 못하는 마음을 갖고 삽니다.
굳이 자잘한 예를 들것도 없이 어울려 사는 사회에서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더러 속이 상하고, 한바탕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대체로 인내하거나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상처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더러 아주 가혹하고 인정사정없이 상대를 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주 중요한 것을 잊고 사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듯이, 나 또한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으며 내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남도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회는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고, 삶의 굴곡이 아주 심한 여행입니다.
지금 헤어진 사람과 나중에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보여준 작은 인정이 몇곱절의 보답으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매사에 인정을 남겨두면 훗날 다시 만날 때 좋은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 옮겨온 글
凡事留人情, 後來好相見-출처:맹자
01. 마음
02. 마음의 노래
03. 아름다운 마음
04. 마음의 눈
05. 마음이 마음을 안다
06. 마음에 향기를 담고
07. 마음의 문을 열며
08. 마음의 그림자
09. 님 향한 마음
10. 마음의 도리
11. 마음이 허공 같을때
12. 내 마음의 기도
13. 이 마음 빈 들이여
14. 내 마음은 가을달인가
15. 청정한 마음
16. 선의 마음
17. 마음을 청정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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