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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風景

길에서 만난 꽃들

by 진 란 2010. 8. 10.

 

 

 

길목에 서 있는 바람

마종기

 

 

한 세월 멀리 겉돌다 돌아와 보니

너는 떠날 때 손 흔들던 그 바람이었구나.

 
새벽 두 시도 대낮같이 밝은

쓸쓸한 북해와 노르웨이가 만나는 곳

오가는 사람도 없어 잠들어가는

작고 늙은 땅에 손금처럼 남아

기울어진 나그네 되어 서 있는 길목들.

떠나버린 줄만 알았던 네가 일어나

가벼운 몸으로 손을 잡을 줄이야.

 
바람은 흐느끼는 부활인가, 추억인가.

떠돌며 힘들게 살아온 탓인지

아침이 되어서야 이슬에 젖는 바람의 잎.

무모한 생애의 고장난 신호등이

나이도 잊은 채 목 쉰 노래를 부른다.

두고 온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바람이 늘 흐느낀다는 마을,

이 길목에 와서야 겨우 알겠다.

 

 — 시집 『하늘의 맨살』(문학과지성사, 2010)

 

 

 

 

붉가시나무의 사랑

정일근


  누군가 붉은 꿈을 아프게 꾸나보다 꽃잎이 붉어지며 바람이 뜨거

운 밤 허물을 벗어놓고서 뱀 한 마리 기어간다


  당신이 가는 길을 나도 따라 가느니 사랑과 이별이 한 몸이라 하였

으니 사는 일 죽는 일이언정 무엇이 다른지요


  차가운 전생에서 여기까지 따라와서 붉가시 그 하나가 심장 깊이

박히는데 더 깊은 내생來生의 눈씨가 반짝하며 불을 켠다

 

 - 『우리시』 (2010, 3)

 

 

 


달빛

남혜숙

 

 

담벼락에 말라붙은 달팽이 하나

 

그가 지나온 점액질의 길에

 

오늘 밤 일찍이 찬 달이 떠오르고

 

부서질 듯 투명한 달팽이 껍질 위로

 

막무가내 쏟아지는 달빛 소나기

 

저 붓다의 계수나무 아래

 

환한 피륙으로 바래져 가고 있는

 

한 생의 기나긴 면벽수행

 

지금 누군가 눈부신 바랑을 지고 있다

 

-격월간 『 유심』, 2010, 05/06

 

 

 

남유정


들어서는 순간 모습은 사라집니다. 눈보라 속으로 깊어지는

길이 있을 뿐 나는 당신에게 깊숙이 발을 묻습니다.


흰눈 소복한 길, 잔가지들은 목화송이를 답니다. 산 모롱이를

돌아가는 날짐승의 거친 숨소리가 보입니다.


당신의 가슴은 너무 깊어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무수한 길은 나를 망설이게 합니다.


이렇게 많은 길이 당신에게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인가요?

 

-시집 『기차는 빈 그네를 흔들고 간다』(문학의전당, 2007)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시집 『자명한 산책(문학과지성 시인선 281),2003

 

 

 

안부를 찍다

박해림 

 

이토록 애타게 불러낸 적 없다, 너를

이토록 진지하게 안부를 물은 적 없다

자음과 모음의 달콤한 수작

인조 속눈썹을 달고

너를 핥을 수 있다니,

안녕,

수초처럼 흔들리는 기호, 기호들

 

비 올 확률 80%, 북대서양 고기압, 황사 동반한 햇빛 조금…

엠피쓰리, 깍지 낀 다리 범람한 강물이 꿀꺽 먹어치운다

종일 안부를 찍찍 찍어대던 손가락들

전송되지 못하고 중간에서 헐떡인다 삭제된다

오가지 못한 순간들이 손가락 끝에서

코딱지처럼 버려진다

 

말이 궁금해!

 

내게서 빠져나간 너의 기억

제발 새 발자국처럼

찍어줘, 나를

콩깍지를 벗겨줘


무음처리 되고 있다

자음도 모음도 되지 못한

너,

 


《시와세계》2010년여름호

 

 

 

 

 

 만해사가 있는 쪽 전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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