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국가-부동산-개인, 삼각동맹의 서울 강남 개발사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반추하는 소설 < 강남몽 > 과 드라마 < 자이언트 >
문화방송 < 우리 결혼했어요 > 에서 소녀시대의 서현은 자신의 가상 남편 정용화에게 책을 추천했다. < 아무도 네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 는 자기개발서다. 서현은 패스트푸드도 먹지 않을 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하다고 한다. 10~20대가 많이 가는 사이트에는 얼마 전 '○○기업 과장 스펙'이라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 과장은 20대에 유학, 경영학석사(MBA), 각종 공모전 입상, 여러 기업의 인턴 근무를 해냈다. 글 밑으로는 "성공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열심히 공부해야지" 같은 댓글들이 달렸다. 자기개발서를 읽는 10대 중 서현처럼 될 확률은 0.1%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못한다. 성공은 좋은 차, 아파트, 명품, 안정된 결혼(가능성)을 약속한다. 실패는 그들을 '월급 88만원'의 삶으로 밀어넣는다. 성공의 문은 더욱 좁아졌고, 성공과 그렇지 못한 삶의 격차는 더 커졌다. 청년세대의 자기관리에 대한 강박은 이 모순에서 생긴 생존본능이다.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의 회고록
그들에게 이런 DNA를 박아넣은 건 당연히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들이다. 기성세대가 한창일 때, 그들은 승자의 세상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들은 경제가 계속 성장할 거라 믿었고, 자신도 승리자가 될 거라 믿었다.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 10년 뒤에 재벌이 되고, 옆집 식모가 어느 날 갑자기 톱스타가 될 수도 있었다. 황석영의 소설 < 강남몽 > 과 SBS < 자이언트 > 에 기이하게 닮은 사람들이 나오는 건 그 때문이다.
< 강남몽 > 에는 10여 년 만에 가난한 식당집 딸에서 서울 강남 한복판의 나이트클럽 사장이 된 박선녀가, < 자이언트 > 에는 10여 년 만에 작부에서 최고급 클럽의 사장이 된 유경옥(김서형)이 있다. 그들에게는 < 강남몽 > 의 대성건설 회장 김진 같은 '스폰서'가 있고, 스폰서들 밑에는 손발이 돼줄 남자들이 있다. < 강남몽 > 의 심남수는 자본가 대신 부동산 투기를 해주다 백수에서 수백억원대의 자산가가 됐고, < 자이언트 > 의 이강모(이범수)는 만보건설 용역반장에서 한국 최고의 기업인이 된다. 물론 이강모에게는 < 강남몽 > 의 조폭 홍양태처럼 회사의 이권을 따내기 위해 폭력을 휘두른 과거가 있다.
< 자이언트 > 와 < 강남몽 > 은 그 시절에는 권력·자본·미모·주먹·인맥 어느 하나라도 가지면 성공의 줄을 잡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들의 부는 서울 강남에서 나왔다. 정부가 강남 개발을 지시하면 < 자이언트 > 의 황태섭 같은 건설업자가 수주를 맡아 부를 키우고, 심판수와 이강모는 그들의 일을 대신하며, 그들의 부 중 일부는 박선녀가 경영하고 홍양태가 '보호'하는 유흥업소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번 돈으로 다시 강남의 땅을 산다. 두 작품이 이야기의 시작점을 군인 출신으로 국가 '정보'를 다루던 김진과 조필연(정보석)으로 잡은 건 우연이 아니다. 무력과 정보를 가진 군인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들 뜻대로 나라를 개발했고, 김진처럼 스스로 개발에 뛰어들거나 조필연처럼 황태섭 가문과 혼맥을 맺으며 자본을 얻었다.
강남 개발사는 김진과 조필연 같은 '자이언트'들로부터 시작된 강남 카르텔의 역사였고, < 강남몽 > 과 < 자이언트 > 는 이 카르텔의 형성 과정을 그린다. 군인 출신 정치가는 개발을 빌미로 정치자금을 모으고, 기업가는 정경유착과 담합으로 부를 축적하며, 깡패들은 정치가와 자본가의 골칫거리를 '용역'하며 강남의 유흥업소를 소유한다. 하지만 황석영은 이 폭력과 부패를 먹고 자란 거인들의 카르텔에 분노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누군가의 평전을 쓰듯 담담한 문체로 강남의 거인들에 대해 서술한다. 몇 개의 챕터로 나눠져 짧게 서술된 이 '강남 거인'들의 이야기는 독자에게 그들에 대한 선악 판단이나 분노를 요구하지 않는다. 평가해야 할 것은 그들이 모여 만들어낸 이 시대의 모습이다. 김진이 부정부패로 쌓은 대성백화점(실제의 삼풍백화점)은 붕괴됐다. 그건 < 자이언트 > 에서 이강모가 조필연에게 "당신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강남이) 좀더 사람 살 만한 곳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조필연 같은 자가 정치자금을 끌어모으지 않았더라면, 대성백화점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 자이언트 > 는 이 개발 시대에 자이언트가 되려다 괴물이 돼버린 인간들 개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황태섭은 애초에 좋은 자재를 써서 좋은 집을 지으려는 건설업자였다. 하지만 그는 건설 자금 때문에 자신의 친구가 조필연에게 죽는 것을 묵인했고, 조필연과 유착해 회사를 키운다. 아버지가 죽은 이유를 모른 채 황태섭에게 길러져 건설 수주를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이강모도 마찬가지다. 황태섭의 말대로 "세상은 진흙탕"이고, 성공하려면 "진흙을 묻혀야" 한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조필연에게 접근했지만, 점점 더 조필연처럼 폭력에 무감각한 인간으로 변하는 이성모(박상민)는 그 시대의 인간들이 어떻게 도덕을 버렸는지 보여준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착했던 이강모와 이성모의 아버지는 죽고, 형제는 탐욕스러운 아버지들 밑에서 자란다. 그때부터 그들의, 우리의 역사는 뒤틀렸다. 그러나 < 자이언트 > 에서 이강모는 결국 '착한 기업가'가 된다. 그는 가족을 지키려는 따뜻한 마음을 지키며 그 자신을 괴물로 만들지 않았고, 2010년에 "좋은 건물을 짓는" 기업가가 된다.
이는 < 강남몽 > 과 정반대의 결론이다. < 강남몽 > 에서 강남 아파트 단지의 파출부를 하는 김점순은 부유한 사람들 중 행복한 가족을 유지하는 경우는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 자이언트 > 는 우리가 어쨌든 부를 쌓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 나은 시대를 만들면 된다고 말한다. 진흙탕 같은 세상을 지나온 사람들이 '착한 기업가'가 될 수 있다면 세상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 강남몽 > 은 과거가 현재를 붕괴시키는 중이라고 본다. 김진이 건설한 백화점에 그의 정부 박선녀가 깔린다. 그리고 그 옆에는 김점순의 딸 임정아가 함께 깔려 있다. 강남 개발로 상징되는 과거의 죄악이 그 설계자와 가족과 그다음 세대까지 압사시키려 한다.
< 강남몽 > 이 무너진 시대의 괴물 < 자이언트 >
파괴된 건물 더미 속에서 임정아 같은 이 시대의 20대는 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꼼지락거린다. 자기개발서를 읽고, 끊임없이 스펙을 쌓으면서. 하지만 임정아가 폐허에서 살아난다 해도, 그는 김진이나 박선녀 같은 기회를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강남 개발이 한창일 때, 그의 아버지인 막노동꾼 임판수의 몸값은 하루가 다르게 올랐다. 그 시절 강남의 부는 권력자와 자본가와 하수인까지 먹여살릴 수 있었다. < 강남몽 > 이 그 시대를 "기묘한 것은 어쨌든 그 기간에 손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고 서술한 이유다. 하지만 어느새 경제성장은 점점 더뎌지고, 인구는 감소세로 돌아서기 직전이다. 강남에 집중될 부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임판수의 삶은 다시 어려워졌고, 조폭들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며, 누군가는 해외로 떠났다. 그리고 정부는 4대강을 '개발'해 경제를 살리겠다고 한다. 그건 우리에게 지금도 모두 '자이언트'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할지 모른다. 물론 그건 각자의 선택이다. 다만, 폐허 더미에 깔린 그들을 구할 수 있다면 말이다. 과거가 쌓은 폐허 더미에서 "여기 사람 있어요"라고 힘겹게 외치는 임정아 같은 이 시대의 '사람'들을.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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