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채석강과 적벽강 | ||||||||||
근심이 깊다. 켜켜이 쌓인 시간 앞에 선다. 많이 잡아야 100년, 고작 그 시간을 살다 가면서 비루한 고뇌로 성을 쌓는다. 거기 가면 사람은 한없이 작아지고, 어떤 근심도 사소한 것이 된다. 시간은 흘러갔다고 그냥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어서 그 오랜 흔적을 겹겹 바위들의 층으로 새겼다. 부안 채석강이다. 곁엔 적벽강이 있다. 그 거대한 시간 앞에서 겨우 사람인 나는 많이 초라해져서 편안하다. 한갓 창백한 점일 뿐인 사람이 그것을 인정할 때 오는 안도가 바다를 건너간다. 채석강과 적벽강은 바위의 물결이다. 수 천 년을 켜켜이 쌓아올린 바위층은 시간의 아름다운 흔적이며 억겁의 세월이다. 바다에 붙은 강 이름은 어떤 시인들의 운명 같은 것이다. 이태백은 강물에 어린 달빛을 좇아 강으로 들어갔다. 그 길로 아주 갔으니 참으로 시인다운 죽음이었다. 중국의 그 강이 채석강인데, 부안의 그것과 닮았다. 적벽강 역시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가 놀았던 그 ‘적벽(赤壁)강’에서 따왔다. 바다를 지시하는 강 이름이 무색하지 않다. 시간이 만들어내는 가장 빛나는 수사들이 거기 있다.
너무 아름다워서 부서져야 했던 단애 시간이 누워 있다. 먼저 누운 시간 위로 다시 시간이 누웠다. 눕고 눕기의 오래된 반복 뒤에 단애(斷崖)가 거대한 몸을 일으킨다. 바위의 형상이지만 사실은 무형의 시간이다. ‘먼저’와 ‘나중’은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그 사이를 채운 시간의 길이다. 가서 보면 알게 된다. 손이 잡히지 않는 시간의 장엄한 흔적이 채석강에 있다. 그 바위들에 앞에 서면 새겨진 시간이 궁금해진다. 어느 정도일까?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의 상상 너머인 것만은 분명하다. 채석강의 기저층은 화강암과 편마암이다. 그것이 만들어진 시기는 선캄브리아대이다. 지구 전체에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암석의 나이는 38억5000만 년이다. 선캄브리아대는 지구의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했다. 40억 년 전에서부터 6억 년 전까지 약 34억 년 동안을 지속됐다. 최대 40억 살, 최저 6억 살. 이것이 채석강의 나이다. 그 오래된 시간 앞에서 ‘창백한 점’은 그저 바위들이 새긴 유려한 결들을 느낄 뿐이다. 40억 년은 사람의 생각으로 추측 가능한 범위가 아니다. 저 겹겹의 바위들 안에는 사람보다 먼저 지구에 살다간 목숨들이 켜켜이 잠들어 있다. 가끔 40억 년의 잠 속에서 몸을 뒤척일 것이다. 채석강의 비경을 만든 것은 그 목숨들이다. 채석강의 바위 무늬는 그렇게 한때 살아서 지구를 걸어 다녔던 것들의 무게다. 채석강의 아름다움이 죄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저 옛날 격포의 주민들에게 채석강은 풍경이 아니었다. 서늘한 낙인이었다. 이완용이 전라도 관찰사를 하던 시절, 그의 아버지는 부안 동진에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가진 자들에게는 채석강이 수려한 풍경이었을 것이고, 그들 부자는 자주 채석강에 왔다. 눈의 호사도 배를 채운 다음이니 백성들은 산해진미를 대령해야 했다. 그 곤욕을 참지 못한 격포 사람들이 채석강의 가장 아름다운 단애를 부쉈다. 아름다움도 때로 죄가 되는 것이니, 너무 아름다운 것들에게 편한 운명은 없다.
개양할미 깃든 적벽강엔 어부들 기원 쌓여 적벽강의 단애는 붉은 기운이 감돈다. 황토를 이겨 세운 느낌이다. 적벽강의 아름다운 절벽 위에는 ‘개양할미’가 산다. 칠산바다를 지키는 여해신이다. 적벽강 절벽 끝, 수성당에 들어앉은 개양할미는 시간 위에서 바다를 관장한다. 개양할미는 키가 무척 크다. 굽막신을 신고 몇 걸음 보폭이면 서해를 전부 건넌다. 그 바다에 몸을 기댄 사람들에게 개양할미는 삶의 전부였다. 개양할미가 어부들의 목숨을 쥐고 있다. 서해를 걸어 다니며 배들을 지키는 것이 개양할미의 오래된 임무다. 바다의 수심은 개양할미의 생각 속에 있고, 풍랑도 개양할미의 손짓 아래 있었다. 어부들은 자주 적벽강의 절벽을 찾았다. 개양할미에게 제를 올리기 위한 걸음이었다. 믿음은 실존과 연결되는 것이어서 제를 올리고 난 뒤면 바다로 나서는 뱃길이 편했다. 풍랑을 가로질러 노를 저었다. 풍어와 무사귀환, 개양할미는 뱃사람들의 가장 간절한 염원을 지켰다. 그 믿음과 만선의 꿈이 현재의 시간 속으로 묵묵히 걸어 나온 적도 있다. 1992년의 일이다. 수성당 주변에서 저 옛날 뱃사람들의 염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시대를 달리한 제사유물들이 수성당 아래 묻혀 있었다. 종류도 무척 다양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항아리와 잔, 병과 토기류, 청동과 철제유물, 석제모조품이 나왔다. 수성당은 개암할미가 지켜낸 염원들의 아름다운 역사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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