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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소식

고흐가 귀 자른 이유는?

by 진 란 2009. 12. 27.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자신의 귀를 왜 잘랐는지는 오랫동안 미술계의 논쟁거리였다. 정신병설(說), 물감에 함유된 납 중독설, 친구 고갱과의 불화설 등이 그 이유로 제시되곤 했다.

27일 영국 일간 선데이타임스 인터넷판에 따르면 고흐 연구자인 마틴 베일리는 고흐가 귀를 자르고 한 달 후 완성한 '양파가 있는 정물'을 정밀 분석, 그가 평소 의지하던 동생 테오의 약혼 소식에 좌절한 나머지 귀를 잘랐다고 주장했다.

이 작품 오른쪽 아래에는 편지봉투가 하나 그려져 있다. 동생 테오가 1888년 12 월 자신의 약혼소식을 전하고자 파리에서 이 편지를 보냈고, 이미 정신적으로 불안했던 고흐는 편지내용에 충격을 받아 귀를 잘랐다는 게 베일리의 추정이다.

베일리는 작품에 그려진 편지봉투를 현미경으로 살펴본 바로는 봉투 위에 숫자 '67'이 적혀 있었다고 밝혔다. 67은 테오가 살던 파리 몽마르트르의 아파트 근처에 있는 아베스 광장 우체국의 공식 표기다. 이 봉투에는 '새해(New Year's Day)'라는 특별한 표시도 찍혀 있다. 파리 우편박물관에 따르면 19세기 후반에는 12월 중순부터 편지봉투에 이런 표시가 찍혔다.

베일리는 작품 속 편지에 테오가 애인 요한나 봉어에게 청혼했다는 소식이 담겨있었다고 주장했다. 12월21일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결혼 허락을 구한 테오는 뒤이어 형 빈센트에게도 이 소식을 틀림없이 전했으리라는 분석이다.

테오는 형 빈센트가 금전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크게 기대던 동생이었다. 고흐에게는 이 편지가 무척이나 큰 의미를 띠었기 때문에 그가 의도적으로 편지봉투를 작품에 끼워넣었다는 것이 베일리의 결론이다.

헤럴드생생뉴스(online@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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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귀를 자른 진짜 이유는?
 
 


 
세계 미술 애호가들에게 사랑받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 거칠고 강렬하면서도 애잔한 고흐의 감성은 작품에 그대로 반영돼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고흐는 화폭에 담긴 자신의 그림만큼이나 정상 궤도에서 벗어난 예술가의 삶을 살았다. 정서적으로 늘 불안했으며 자해를 하는 등 기행을 일삼았다.

특히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일화는 여러 영화에서 단골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 이유를 둘러싸고도 그동안 많은 억측이 제기된 바 있다.

단순히 정신착란 증세 때문이라는 추측과 함께 그림을 그리다 그의 광기가 폭발한 것이란 설도 있었다. 또 예술적 동지였던 폴 고갱과 사이가 틀어져 충격을 받고 자해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고흐는 귀를 자르고 1년 7개월 만에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쏴 자살을 기도했으며 그로부터 이틀 뒤 사망했기에 그 이유가 더욱 많은 의혹을 낳았다. 그런데 고흐의 전기를 집필한 영국 작가가 그 이유를 밝혀냈다고 주장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 프로방스에서 온 편지'와 '영국의 반 고흐: 청년 예술가의 초상'의 저자인 마틴 베일리는 "고흐가 남동생 테오로부터 결혼할 것이란 편지를 받고 그 충격으로 귀를 잘랐다"고 밝혔다고 영국 일간 더 타임스가 27일 보도했다.

베일리는 고흐가 귀를 자른 시기, 그가 동생과 주고받은 편지 등을 조사해 이 같은 결론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고흐는 평생 동안 테오에게 재정적, 정신적으로 크게 의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리에서 지내던 테오는 1888년 12월 편지로 약혼 소식을 고흐에게 알렸다. 고흐는 동생이 결혼하면 자신에 대한 재정 지원을 끊고 정신적으로도 더 이상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란 두려움에 사로잡혀 공황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베일리는 고흐의 편지를 분석한 결과 그가 매달 23일 테오로부터 용돈을 받아썼으며 생활비가 부족해 한 달에 두 차례 돈을 받은 적도 있다고 밝혔다. 1889년 1월 고흐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는 "지난달 받은 돈이 너무 부족하다"고 적은 내용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편지와 당시 정황을 미뤄볼 때 고흐는 테오가 1888년 12월 21일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적은 것을 옆에서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 테오가 자신의 약혼자인 요한나 본저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흐와 관련해 언급한 내용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 편지엔 "내가 형에게 당신에 대해 얘기하고 우리의 (결혼) 계획에 동의하는지 물어봤을 때, 형은 결혼이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가 돼선 절대로 안 된다고 대답했다"고 적혀 있다.

남원상 기자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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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연구팀 “반 고흐 귀는 고갱이 잘랐다”

 

[서울신문 나우뉴스]인상파 천재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귀를 잘랐던 사람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예술적 동지였던 고갱이었다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모으고 있다.

지금까지 반 고흐는 심각한 정신분열증에 시달렸으며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인 1888년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직접 자르고 '붕대를 감은 자화상'(Bandaged Ear)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 바 있다.

 

 

하지만 한스 카우프만 함부르크 대학 미술사학과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들은 기존 주장들을 뒤엎고 "반 고흐의 귀를 자른 것은 그의 친구였던 폴 고갱(1848-1903)이었으며 반 고흐는 고갱을 감싸기 위해 죽기 전까지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한스 카우프만과 리타 빌데간스의 공동 저자는 최근 발간한 저서에서 "두 사람이 프랑스 아를에서 함께 살던 중 고갱에게 떠나겠다고 선언하자 반 고흐가 쫓아 나왔고 둘은 격렬한 언쟁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 과정에서 훌륭한 검술을 갖고 있던 고갱이 자기 방어 때문에 혹은 화가 나서 칼을 휘둘렀고 반 고흐의 귓불을 잘랐다."고 설명했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고갱이 귀 절단 사건 직후 사라진 점과 고갱이 그 후 아를에 남겨놓은 펜싱 마스크와 장갑을 되찾으려고 했던 것에 반해 펜싱 검은 찾지 않았던 점, 그리고 반 고흐가 생전 남동생 테오(Theo)와 주고받은 서신의 내용 등을 들고 있다.

서신에서 반 고흐는 "누구도 내가 범죄를 저지르는 모습을 본적이 없고 그 어떤 것도 내가 진실을 은폐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또 반 고흐는 생전 고갱을 향한 마지막 언급에서 "너는 말이 없구나. 나 역시 그럴 것이다."("You are quiet, I will be, too")고 남긴 점을 두고 두 사람 간에 '침묵의 서약'을 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고 연구진들은 덧붙였다.

이밖에도 연구진들은 반 고흐가 붕대 감은 귀를 그린 스케치 중 하나에서 '발작'((ictus)이라고 써놓은 점에 주목하고 펜싱에서 이 단어의 라틴 용어가 '치다'로 쓰인다고 지적했다.

한편 대다수의 미술 역사학자들은 '반 고흐의 귀 절단' 사건을 정확하게 설명할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고 반박하지만 한스 카우프만이 이끄는 연구진은 자신들의 해석이 정황상 가장 논리적이라고 맞서고 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서울신문 | 입력 2009.05.05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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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잘린 귀는 고갱의 소행?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로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의 귀를 자른 사람이 본인이 아닌 친구였던 폴 고갱이었다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인터넷판은 5일 독일 예술사학자들의 주장을 인용하며, 고갱이 고흐와 언쟁을 벌이던 중 고흐의 귀를 칼로 벤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반 고흐가 극심한 정신분열증에 시달린 끝에 광기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귀를 잘랐다는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내용이다.

독일의 예술사가인 한스 카우프만과 리타 빌데간스는 법적 처벌을 피하려는 고갱과 친구와의 우정을 이어가려 했던 반 고흐가 암암리에 맺은 협정때문에 이 사실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들에 따르면, 고갱은 반 고흐와의 불화 끝에 반 고흐의 ‘엘로 하우스’에서 나왔다. 뛰어난 펜싱 실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고갱은 손에 아끼던 펜싱 검을 쥔 상태였다.

이 때 고흐가 고갱을 뒤따라 왔고 두 사람은 인근 사창가에 도착할 때까지 격렬한 말싸움을 벌였고 극에 달하자 고갱이 홧김에, 혹은 자기 방어를 위해 고흐의 왼쪽 귓볼을 잘랐다.

그 후 고갱은 에페를 론 지방에 버렸고 반 고흐는 잘린 귓불을 한 창녀에게 전해준 뒤 비틀거리며 집에 돌아와 다음날 자신을 찾아온 경찰에게 사실과는 전혀 다른 진술을 했다는 게 이들이 말하는 사건의 전말이다.

카우프만과 발데간스는 반 고흐와 함께 살았던 고갱이 이 사건 이후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이 주장을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고흐가 자살하기 전 고갱에게 “너는 조용하구나. 나고 그럴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보아 이 주장이 가장 논리적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또 반 고흐의 귀 스케치에 쓰인 ‘익투스(ictus)’가 펜싱용어로 ‘치다’라는 뜻이며 귀 위쪽 지그재그 모양의 상처도 고갱의 칼이 남긴 자국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다른 반 고흐 전문가들은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하다며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긴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양춘병 기자(yang@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