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사람과 아름다운 서화에 취하다
"신윤복 작 <소년전홍>에 대해 글쓴이는 “쑥덕질 받기에 딱 알맞은, 무람하기 그지없는 그림”이라고 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젊은 서방은 대놓고 계집질한다.…시방 사내는 몹시 급하다. 마나님은 집을 비웠고,
보는 눈 하나 없는 뒤뜰이다. 몸종은 벌건 대낮이 부끄러운지 뒷머리를 긁적인다.” 생각의나무 제공
<꽃 피는 삶에 홀리다>
손철주 지음/생각의나무·1만2000원
명민한 에세이스트였던 20대의 죄르지 루카치는 썼다. “좀체 붙잡을 수 없는, 영혼의 가장 은밀한 곳에 자리잡은 심상(心狀)과 동경이 에세이를 낳는다.” 학고재 손철주 주간이 쓴 <꽃 피는 삶에 홀리다>에는 이런 에세이의 본령에 충실한 단편들이 가득하다. 말하자면 이 책은, 짧아서 황홀한 봄의 열락을 움켜쥐고 싶은, 늙어가는 중년 사내의 속절없는 욕망과 번민의 진열장이다. 그 드러냄이 추함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넉넉한 해학과 속 깊은 사유로 깎아 놓은 웅숭깊은 문장의 힘이다.
책을 이룬 50편의 글 꼭지는 세 덩어리로 묶인다. 1장 ‘꽃 피는 삶에 홀리다.’ 가족과 친구, 먹을거리 등을 통해 발견한 삶의 즐거움과 깨달음을 풀어냈다. 2장은 사람 이야기다. 고려의 충선왕과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 글쓴이가 사숙한 소설가 이병주 등이 등장한다. 모아 붙인 이름이 ‘사람의 향기에 취하다’이다. 3장은 ‘봄날의 상사(相思)를 누가 말리랴.’ 그림과 글씨 이야기다. 단원·혜원의 춘화첩부터 조선 후기 문인화, 한국화가 사석원 등의 작품 이야기가 펼쳐진다. 손 주간이 신문과 잡지 등에 쓴 글 가운데 산문의 매혹과 인생의 연륜이 느껴지는 ‘좋은 글’만 가려 실었다는 게 편집자의 설명이다.
좋은 글은 즐거움을 주지만 빼어난 글은 고통을 남긴다. 글품 팔아 사는 이들에게 손 주간의 문장은 칼침이요 총탄이다. “보라.” 그의 글은 소리치는 듯하다. “이것이 문장이다.” 그의 비범한 필법에는 한자말이 자주 등장한다. ‘암암하다’ ‘음송하다’ ‘유려한 행초’ ‘난만하게’ ‘허허롭다’ ‘핍진하기보다 소루하고’ ‘묵흔의 암향’ ‘번연하다’ 등이 그렇다. 한시 읽기라는 취미와 무관치 않은 듯한데, 그의 취미는 이것 말고도 많다. 책날개에 적힌 소개말이 증언한다. “한시와 꽃, 그림과 붓글씨 한잔 술이 있으면 썩 잘 노는 사람이다.” 한량이란 얘기다.
먹거리 등 일상의 즐거움 충선왕·이병주 인물 얘기
단원·혜원 춘화첩 감상 등 빼어난 50편 에세이 묶어
그의 장기는 빠른 속도감이 느껴지는 단문이다. 예컨대 이런 문장들. “잊고 있던 그 선배가 찾아왔다. 그에게만 빨리 간 시간이 얼굴에 완연했다. 악수하자며 내민 손이 예전처럼 곱다. 한때 글 쓰는 직장에서 밥을 번 그 손이다.”(‘향기는 가고 냄새는 남다’) “부시의 말은 잽도 없다. 불문곡직, 스트레이트 펀치다. ‘이라크, 이란, 북한은 악의 축이다.’ 맞든 틀리든 그는 할 말을 다 쏟아버리고 있다. 그러니 수사가 낄 틈이 없다. ‘악의 꽃’은 수사이지만 ‘악의 축’은 체증 걸린 조어다.”(‘한 가지 일, 한 가지 말’)
이런 단문의 연쇄에 활력을 불어넣는 게 대구와 리듬감이다. 율시·절구의 문장들로 다져진 공력일 터이다. “청춘은 축복이고 여자는 은총인데, 축복과 은총을 넘보는 우리의 눈길은 추파라고 했다. 닿을 수 없는 것은 아득한 것이 아니라 머쓱한 것이라고 했다.”(‘좋은 것 두고 떠나는 게 인생이야’) “양처의 선정이 불쑥 두렵다. 차라리 악처의 학정에 신음하는 게 낫겠다 싶다.”(‘호랑이 등에 탄 아내여, 내려오라’)
그렇다고 단문만 편애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장문의 아름다움을 논하며 인용한 것이 서울대 미대 초대 학장을 지낸 김용준의 다음과 같은 글이다. “그 수묵 빛깔로 퇴색해버린 장지 도배에 스며드는 묵흔처럼 어렴풋이 한두 개씩 살이 나타나는 완자창 위로 어쩌면 그렇게도 소담스런, 희멀건 꽃송이들이 소복한 부인네처럼 그렇게도 고요하게 필 수가 있습니까.”(‘부드럽고 구수하고 어리석고 아름다운’) 이 글의 ‘맛’을 두고 글쓴이는 “이미지를 리듬에 실을 줄 아는 너름새에서 오는 것”이라며 “유장과 만연의 곱씹는 맛은 이제 아는 자만 아는 특미가 되어버렸다”고 아쉬워한다.
면면이 금은이요, 알알이 주옥이지만 으뜸을 꼽으라면 단연 ‘내 사랑 옥봉’이다. 조선 선조때 여성 시인 이옥봉을 향한 애잔한 연정을 담담하게 풀어낸 글이다.
“내 어쩌다 남의 소실에게 마음을 빼았겼는지, 여기서 장광설을 펴진 않겠다. 시작은 가여워서 그랬다.(중략) 불면의 밤은 옥봉에게 유독 길었다. 안면을 돕지 못해 나는 안타까웠다. 운명은 삼켰으되 순정은 요동치는 그런 날 옥봉이 쓴 시는 위태롭다.”
그가 위태롭다 이른 오언시는 이러하다. “깊은 정 드리기는 쉽겠지요/ 말로 하려니 또 부끄럽습니다/ 제 있는 곳 소식 알고 싶나요/ 벗겨진 화장 그대로 누대에 기댑니다.(深情容易寄 欲說更含羞 若問香閨信 殘粧燭倚樓)”
한겨레/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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