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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風景

마침내 열린 경북궁 신무문

by 진 란 2008. 8. 24.

[기고] 마침내 열린 경북궁 신무문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이 45년 만에 일반에게 개방됐다. 청와대 본관 정문과 마주하고 있는 신무문 개방 현장에서 대통령 내외분, 어린이, 시민들과 함께하고 보니 경복궁과 함께 숱한 인생 역정을 겪어온 도편수로서 감회를 몇 자 적지 않을 수 없어 펜을 들었다.

신무문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경복궁이 일반에게 공개된 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군부대가 경복궁에 주둔하고부터 폐쇄됐다. 신무문은 제왕의 궁에는 동서남북 4개의 문을 두는 역대 궁성제도에 따라 세종15년(1433년) 창건됐다. 성종 6년(1475년)에 자연계를 지켜주는 네 마리 신령한 동물 중 북쪽을 상징하는 현무를 뜻하는 신무문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소실됐다가 고종 2년(1865년)에 중건됐다.

신무문과 함께 45년간 출입이 금지되었던 집옥재도 이번에 굳게 걸었던 빗장을 풀고 일반인들을 맞이한다고 하니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복궁 북쪽에 위치한 집옥재는 고종 28년(1891년) 창덕궁에서 이건되어 어진(御眞) 봉안소, 외국 사신의 접견소, 서재(書齋)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던 곳이다.

신무문과 집옥재 개방으로 광화문에서 근정전으로 향하는 첫 번째 궐문인 흥례문과 신무문, 청와대 앞길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이를 계기로 관광객들은 새로운 역사적 명소를 돌아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제에 의해 수많은 건물이 훼손되어 몇 동의 건물만 겨우 궁궐의 맥을 유지하던 경복궁은 1990년 복원 사업을 시작으로 조선의 정궁으로 모습을 조금씩 갖추어 가고 있다. 조만간 광화문도 원 위치에 복원되어 그 앞에는 광장까지 조성된다고 하니 이제 경복궁이 과거의 권위와 장엄함을 되찾을 날도 머지않았다고 생각한다.

누구보다 우리의 궁궐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내·외국인들이 경복궁을 방문하여 역사의 향기를 느끼고 전통 건축의 멋과 정교함, 조선 왕궁을 직접 보고 느끼고 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난해 경회루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마음 한 편이 정말 흐뭇했는데, 이제 신무문과 집옥재가 가세해 더 많을 것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줄 것이라 생각하니 그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하겠는가? 또한 곧 시작되는 광화문 복원공사가 완성되면 경복궁은 숙정문·신무문 개방과 더불어 온 국민의 문화공간으로서 활용되고 우리의 대표적 문화유산으로서의 지위가 확고히 다져질 것으로 기대한다.

필자는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74호 대목장으로 인정받아 경복궁 복원 시작과 함께 경복궁의 옛 모습을 만들어 나가는 데 15년을 함께 했다.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침전을 시작으로 동궁, 흥례문, 그리고 이번에 개방되는 집옥재 지역과 명성황후의 시해 장소인 건청궁 등 건물을 하나하나 복원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총망라해 정성을 쏟고 있다. 경복궁 복원공사를 시작하던 날 품었던 각오와 다짐으로 마지막까지 경복궁 복원에 혼을 다 바치는 것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신응수 경복궁 도편수/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
 

[여적] 신무문 개방

 


 
조선 중종 때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파가 몰락한 기묘사화
‘북문지화’(北門之禍)라고도 불린다.
 
여기서 북문이란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말한다.
 
남곤 등 훈구파가 한밤에 절차를 밟지않고 비밀리에 신무문을 통해
궁으로 들어가 중종의 지시를 받아 사림파를 숙청했던 것이다.
이로써 유교적 왕도(王道)정치를 꿈꾸었던 조광조의 개혁은 물거품
이 됐다. 급박했던 기묘사화의 동선(動線)은 신무문에서 시작됐다.

경복궁의 문은 4개이다.
정문이자 남문인 광화문(光化門),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서문인
영추문(迎秋門), 그리고 북문인 신무문이 그것이다.
 
다른 문들과는 달리 신무문은 평상시 닫아놓고 잘 사용하지 않았다.
신무문 밖은 경복궁의 후원으로 왕이 열병하거나 농사를 장려할 때
이 문을 이용했다. 영조는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에 갈 때 터만 남은 신무문으로 나갔다고 한다.
고종이 아관파천할때 신무문을 통해 몰래 나갔다는 설도 있다.

조선조 정궁인 경복궁의 운명은 기구했다. 신무문도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될 때 신무문도
불에 탔다. 신무문은 경복궁 중건으로 복원될 때까지 300년 가까이 수난을 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경복궁은 또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됐다.
신무문은 경복궁 내 숱한 전각들이 헐리고 파괴되는 것을 묵묵히 지켜봐야 했다.
 
광복 이후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1961년 군사 쿠데타 이후 군부대가 경복궁에 주둔하게 되면서 신무문은 오랫동안 ‘보안과 경호’의 뒷전에서 굳
게 닫혀있어야 했다.

신무문이 어제 개방 행사를 치르고 45년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서울성곽 북쪽문인 숙정문의 개방, 청와대 뒷산의 단계적 개방 등과 맥을 같이 한다.
시민들은 신무문을 통해 경복궁을 드나들고 경복궁 돌담길의 정취를 더욱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신무문 앞에서 보는 인왕산북악산의 아름다운 4계절의 풍광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시민들이 500년 넘는 역사적 사연을 간직한 신무문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연재 논설위원〉
 

노대통령 “경복궁서 청와대 가는길은 ‘제왕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29일 "권력을 가진 자와 국민이 소통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전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개방행사에 참석, "과거에는 제도적으로 이 소통을 막아놓았고, 지금은 법적으로는 소통이 잘 되게 했으나 그래도 거리가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신무문은 청와대 본관 정문과 마주하고 있다는 이유로 1961년 5ㆍ16 군사쿠데타이후 폐쇄되면서 군부대가 상주했으나 1996년 이들이 철수하면서 복원 등 사전 준비를 거쳐 45년만인 이날 문이 다시 열렸다. 청와대로 향하는 길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노 대통령은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받는 사람 사이에 가장 큰 단절은 소통이 안되는 것으로, 생각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르고 따로 사는 것"이라며 "이런 게 오래가면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잘 살겠지만 일반 국민은 살기가 어려워진다. 권력은 높아지고 소통은 안되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노 대통령은 "외국의 덩치 큰 문화재, 건물이든 조각을 보면 저걸 지으려고 얼마나 큰 권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동원했을까, 또 하나는 어떻게 지었을까 기술이 궁금하다"고 말한 뒤 과거 왕이 서재 등으로 사용했던 집옥재를 가리키며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렸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까. 그냥 반갑다, 아름답다는 느낌만 든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광화문을 지나 청와대 바로 앞의 신무문에 이르기까지를 지칭, "이 길 이름을 붙이자면 `제왕로'라고 하겠다. (경복궁역에서 내려) 내가 주인이다 하는 생각으로 청와대까지 걸어갈 수 있는 길이니까"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여기와서 청와대 한 번 보고 대통령 일 잘하나 한 번 쳐다보고 해라"며 "이렇게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국민 사이에 길이 열린 게 참 의미가 있다. 기분이 좋다"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은 행사 주 참석자인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앞으로 여러분을 잘 모시겠다"며 "(임기를) 마치면 제가 종로에 살지도 모르고, 아니 고향에 가긴 가지만 자주 오게 될 것이다. 자주 만나고.."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특히 이날 행사에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후손으로 경복궁 관리일을 맡고 있는 고니시 다카코(여)씨와 한국문화를 좋아해 한옥에서 살고 있는 프랑스인 사업가 필립 티로다씨를 특별히 소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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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정궁인 경복궁 4대문 중 유일하게 비공개로 남은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이 45 년 만에 개방됐다.

이로써 경복궁 권역은 사실상 온전히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


문화재청은 29일 청와대 본관 정문과 마주하고 있는 경복궁 신무문 현장에서 어린이, 시민, 문화재 관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신무문 개방 행사를 갖고, 이날부터 이 문을 일반 개방 했다.
 
문화재청은 "역사ㆍ문화적으로도 유의미한 청와대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공간을 국민의 품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북악산 개방과 함께 45년이라는 긴 세 월 동안 '보안과 경호'의 이유로 굳게 닫혀 있던 신무문을 개방키로 했다"고 말했다.

신무문 개방으로 경복궁은 청와대 앞길의 의장행사와 연계한 '원코스' 관람이 가능하게 됐 다.

문화재청은 이번 신무문 개방을 계기로 경복궁 돌담길을 자유롭게 걷고, 경복궁 관람의 접근 성을 높이게 됐으며, 4월 이후 시행 중인 청와대 앞길 의장행사와 북악산 숙정문의 연계된 관람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서울투어의 편의도 제고할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앞서 문화재청은 관계 부처와 협의를 거쳐 북악산을 포함한 서울성곽의 숙정문 일대를 필두 로 경회루(慶會樓)를 개방한 바 있다.

올 11월에는 광화문(光化門) 원위치 복원 사업에 들어가고, 이런 작업들을 토대로 서울의 옛 모습을 되살림으로써 서울을 유네스코 세계역사도시로 등재하기 위한 초석을 마련할 것으 로 기대하고 있다.

신무문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경복궁이 일반에 공개될 때 같이 공개됐으나 1961년 5.16 군사쿠테타 이후 군부대가 경복궁에 주둔하게 되면서 폐쇄됐다.

신무문은 정문이자 남문인 광화문(光化門),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서문인 영추문(迎秋門) 과 함께 세종 15년(1433년)에 창건됐으며, 성종 6년(1475년)에 네 방향을 관장하는 동물신 중 북쪽을 담당하는 현무(玄武)를 뜻하는 신무문이란 이름을 얻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되면서 같이 없어졌다가 고종 2년(1865년)에 경복궁 중건 과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중건 당시 한성부 판윤 조득림이 상량문을 썼고, 현판은 영건도감 부제조 이현직이 썼다고 기록돼 있다.

신무문 개방과 함께 신무문 동남측에 위치한 집옥재(集玉齋)와 협길당(協吉堂), 팔우정(八隅亭)도 일반의 품에 돌아왔다.

집옥재는 고종황제가 경복궁 북측 건청궁(乾淸宮)에 거처할 때 외국사신들을 맞이하거나 서재로 사용하던 곳이며, 팔우정은 서고로 쓰였던 팔각형태 건물이다. 협길당은 그 부속채이 다.

 
궁궐의 북쪽을 지키는 방위신인 현무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신무문의 개방으로 남문인 광화문의 주작과 동쪽 건춘문의 청룡, 서쪽 영추문의 백호와 함 께 경복궁 4대문 4방신의 격식이 완성됐습니다.

신무문과 함께 신무문 안쪽 지역인 집옥재 권역도 개방
 



45년만에 개방된 집옥재 권역
29일 오전 청와대 본관 정문과 마주하고 있는 경복궁 신무문 개방과 함께 45년만에 경복궁 주변 집옥재 권역도 함께 개방되었다. (사진 왼쪽 팔우정, 오른쪽 협길당)


집옥재와 팔우정은 고종황제가 외국 사신들을 맞거나 서재로 사용했던 곳으로 팔각형태와 벽 돌 외벽, 둥근 창문 등 중국풍의 건축형태가 이색적입니다.
 
집옥재는 또한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다.



노대통령, 고니시 유키나가 후손 소개




노무현 대통령이 29일 45년 만에 일반에 개방된 경복궁 집옥재에서 임진왜란 때 일본군 선봉 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후손인 고니시 다카코를 소개하고 있다.

 

경복궁 ‘신무문’ 개방… 盧, “권력 가진자·국민간 길 열린것”

 

문화재청은 29일 청와대 본관 정문과 마주하고 있는 경복궁 신무문 앞에서 개방 행사 를 갖고 문을 활짝 열었다. 이로써 경복궁 권역은 온전히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정문이자 남문인 광화문(光化門),동문 건춘문(建春門),서문 영추문(迎秋門)과 더불어 세종 15년(1433년)에 창건된 북문은 성종 6년(1475년)에 북쪽을 담당하는 현무(玄武)를 뜻하는 신 무문이란 이름을 얻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되면서 없어졌다가 고종 2년(1865년) 경복궁 중건으 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와 함께 신무문 동남쪽에 위치한 집옥재(集玉齋)와 협길당(協吉堂),팔우정(八隅亭)도 개방됐다. 집옥재는 고종이 경복궁 북측 건청궁(乾淸宮)에 거처할 때 외국 사신을 맞거나 서재로 사용하던 곳이며,팔우정은 서고로 쓰였던 팔각 형태 건물이다. 협길당은 그 부속채다.

노무현 대통령은 개방 행사에 참석,“청와대 올 때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내려 이 길을 쭉 걸 어오면 된다”며 “‘내가 주인이다’하는 생각으로 청와대까지 걸어갈 수 있는 길이니 이름 을 붙이자면 ‘제왕로’라고 하겠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노 대통령은 또 “사람은 지배하는 사람도 있고 지배받는 사람도 있는데 이 사이에 가장 큰 단절은 소통이 안되는 것”이라며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국민들 사이에 길이 열린 게 참 의미 있고 기분 좋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특별히 행사에 참석한 일본인 고니시 다카코씨를 가리키며 “이분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후손인데,여기서 경복궁을 관리하고 안내하는 일 을 맡으면서 미안한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사람들> `경복궁 지킴이' 고니시 다카코

6년째 경복궁에서 관광객을 안내하는 일본인 여성 궁궐 지킴이가 있다. 주인공은 고니시다카코(44.여) 씨.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 경복궁을 찾는 이들에게 1시간 30분 가량 경복궁 곳곳을 안내하는 그 는 한국인 남편 신길순(45)씨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둔 평범한 주부다.

지금은 그의 든든한 후원자인 아들(고2)이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로부터 "너네 엄마, 우리 나 라 사람들을 죽인 나쁜 일본 사람이지?"라며 놀림을 당했다고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은 이후 그는 한국을 더 많이 알려고 노력했다.

한국을 알려는 노력중의 하나가 경복궁 가이드.

"경복궁을 찾은 사람들에게 여기서 배운 역사 그대로 전하고 있어요. 일본인들에게는 `일본 에서 배운 것과 다를 수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입증된 내용'이라고 설명하죠"

경복궁에 대한 사랑은 한국 사람 못지 않다.

" 궁궐을 찾는 사람들이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도시락을 펼쳐 놓고 술까지 마시는 것을 보면 안타까워요. 쓰레기를 그냥 놔두고 먹는 사람도 많고... 기본 에티켓은 지켰으면 좋겠어요"

궁궐지킴이 선발 당시에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괜한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단 한번도 결근한 적이 없다고 한다.

"역사 공부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그는 매주 수요일 같이 궁궐지킴이 활동을 하는 사람 들에게 일본어를 강습한다.

고니시씨는 "경복궁 안내를 하다 보면 옛말이 너무 많아 나도 일본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되는지 모르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며 "다른 선생님들에게 역사도 배우고 한국의 문화도 배울 수 있어 일석이조"라고 말했다.

"경복궁 안내를 하면서 역사 공부를 많이 하고 있어요. 공부하다 보니까 일본 사람들이 정 말 나쁜 짓을 많이 했구나 싶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땅을 맨 처음 침략한 왜장(倭將) 고니시 유키나가의 후손으로 알려진 것 에 대해서 그는 "(고니시 왜장의 후손이) 확실한 건 아니고 방계 후손일 수도 있다는 뜻"이 라고 말했다.

그는 "언론에서 내가 왜장의 후손이라든가,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과오를 사죄하는 마음에 서 이런 일을 한다는 점만을 부각한다"며 "처음에는 그런 마음도 없진 않았으나 지금은 정 말 내가 좋아서 경복궁 자원 봉사를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이 일을 하 고 싶다"고 전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9일 오전 경복궁 신무문 집옥재 개방 행사에 참석, "(일본 역사에 대해) 미안하다는 마음을 갖고 여기서 경복궁 관리하고 안내하는 일을 맡아 미안한 마음을 행동으 로 표현하고 있다"며 직접 고니시씨를 소개했다.


 

<완전개방 시대 맞은 경복궁>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조선왕조 정궁(正宮)이자 서울 종로구 세종로 1-1번지인 경복궁이 완전 개방시대를 맞았다. 마지막 금족지(禁足地)라 할 수 있는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일대가 29일 개방됨으로써 이제 경복궁 안에서 시민들이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없는 곳은 사실상 없어졌다.

고종 5년(1868),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 빈전건물로 신축한 태원전(泰元殿) 권역 일대가 여전히 출입통제가 되긴 하지만, 이는 복원사업에서 기인한 것이지, 신무문처럼 청와대 경호 등의 이유로 접근이 원천봉쇄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신무문과 그 주변 집옥재 일대의 개방을 계기로 경복궁은 권역 전체가 온전히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에 접어들었다.

동아시아 전통 궁성 구조인 평형 방형(方形)인 경복궁은 동서남북 네 벽면에 각각 대문(大門) 하나씩을 마련했다. 남문이 유명한 광화문(光化門)이며 동쪽은 봄 기운이 싹트는 곳이라 해서 건춘문(建春門), 그 반대편 서문이 가을을 맞이하는 곳이라 해서 명칭이 영추문(迎秋門)이다.

이들 네 대문 중 광화문에 이어 신무문이 개방됐으며, 문화재청은 건춘문과 영추문 또한 조만간 통로를 여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번 신무문 개방은 경복궁 권역 전체에 대한 복원계획의 일환이다.

일제강점기에 변형, 훼손된 경복궁 권역을 원형대로 복원, 정비함으로써 "민족정기를 회복하고 문화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며, "우리문화의 우수성과 역사성을 널리 알리고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조성하여 역사교육 및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것이 문화재청의 복원 기본 방향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20개년 계획을 세웠다. 90년에 시작된 이 사업은 2009년도에 마무리된다. 총사업비는 1천789억원. 주요 내용은 강녕전 등 93개동 3천250평을 복원한다는 것이다.

순차적 사업진행을 위해 정부는 복원 권역을 구분했다. 90-95년에는 침전 권역 사업을 마무리한 데 이어 94-99년에는 동궁 권역 복원사업을 끝냈다.

96-2001년는 흥례문 권역, 97-2005년 태원전 권역에 이어 2001년 이후 광화문 및 기타권역에 대한 복원사업이 한창이다.

이를 마무리하면 90년 당시 건물 기준 36개동 2천957평이었으나 93개동(3천250평)이 더 늘어나게 된다. 2009년 복원 완료 뒤 129개동 6천207평을 고종 당시 330여개 동, 약 1만5천600평과 비교하면 40% 가량에 이르게 된다.

이런 작업들을 토대로 문화재청은 서울을 유네스코의 역사문화도시로 등재시킨다는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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