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마침내 열린 경북궁 신무문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이 45년 만에 일반에게 개방됐다. 청와대 본관 정문과 마주하고 있는 신무문 개방 현장에서 대통령 내외분, 어린이, 시민들과 함께하고 보니 경복궁과 함께 숱한 인생 역정을 겪어온 도편수로서 감회를 몇 자 적지 않을 수 없어 펜을 들었다.
신무문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경복궁이 일반에게 공개된 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군부대가 경복궁에 주둔하고부터 폐쇄됐다. 신무문은 제왕의 궁에는 동서남북 4개의 문을 두는 역대 궁성제도에 따라 세종15년(1433년) 창건됐다. 성종 6년(1475년)에 자연계를 지켜주는 네 마리 신령한 동물 중 북쪽을 상징하는 현무를 뜻하는 신무문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소실됐다가 고종 2년(1865년)에 중건됐다. 신무문과 함께 45년간 출입이 금지되었던 집옥재도 이번에 굳게 걸었던 빗장을 풀고 일반인들을 맞이한다고 하니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복궁 북쪽에 위치한 집옥재는 고종 28년(1891년) 창덕궁에서 이건되어 어진(御眞) 봉안소, 외국 사신의 접견소, 서재(書齋)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던 곳이다. 신무문과 집옥재 개방으로 광화문에서 근정전으로 향하는 첫 번째 궐문인 흥례문과 신무문, 청와대 앞길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이를 계기로 관광객들은 새로운 역사적 명소를 돌아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제에 의해 수많은 건물이 훼손되어 몇 동의 건물만 겨우 궁궐의 맥을 유지하던 경복궁은 1990년 복원 사업을 시작으로 조선의 정궁으로 모습을 조금씩 갖추어 가고 있다. 조만간 광화문도 원 위치에 복원되어 그 앞에는 광장까지 조성된다고 하니 이제 경복궁이 과거의 권위와 장엄함을 되찾을 날도 머지않았다고 생각한다. 누구보다 우리의 궁궐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내·외국인들이 경복궁을 방문하여 역사의 향기를 느끼고 전통 건축의 멋과 정교함, 조선 왕궁을 직접 보고 느끼고 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난해 경회루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마음 한 편이 정말 흐뭇했는데, 이제 신무문과 집옥재가 가세해 더 많을 것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줄 것이라 생각하니 그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하겠는가? 또한 곧 시작되는 광화문 복원공사가 완성되면 경복궁은 숙정문·신무문 개방과 더불어 온 국민의 문화공간으로서 활용되고 우리의 대표적 문화유산으로서의 지위가 확고히 다져질 것으로 기대한다. 필자는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74호 대목장으로 인정받아 경복궁 복원 시작과 함께 경복궁의 옛 모습을 만들어 나가는 데 15년을 함께 했다.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침전을 시작으로 동궁, 흥례문, 그리고 이번에 개방되는 집옥재 지역과 명성황후의 시해 장소인 건청궁 등 건물을 하나하나 복원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총망라해 정성을 쏟고 있다. 경복궁 복원공사를 시작하던 날 품었던 각오와 다짐으로 마지막까지 경복궁 복원에 혼을 다 바치는 것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신응수 경복궁 도편수/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 [여적] 신무문 개방
‘북문지화’(北門之禍)라고도 불린다.
여기서 북문이란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말한다.
궁으로 들어가 중종의 지시를 받아 사림파를 숙청했던 것이다.
이로써 유교적 왕도(王道)정치를 꿈꾸었던 조광조의 개혁은 물거품
이 됐다. 급박했던 기묘사화의 동선(動線)은 신무문에서 시작됐다.
경복궁의 문은 4개이다. 정문이자 남문인 광화문(光化門),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서문인
영추문(迎秋門), 그리고 북문인 신무문이 그것이다.
다른 문들과는 달리 신무문은 평상시 닫아놓고 잘 사용하지 않았다.
신무문 밖은 경복궁의 후원으로 왕이 열병하거나 농사를 장려할 때
이 문을 이용했다. 영조는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에 갈 때 터만 남은 신무문으로 나갔다고 한다.
고종이 아관파천할때 신무문을 통해 몰래 나갔다는 설도 있다.
조선조 정궁인 경복궁의 운명은 기구했다. 신무문도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될 때 신무문도 하지만 경복궁은 또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됐다.
신무문은 경복궁 내 숱한 전각들이 헐리고 파괴되는 것을 묵묵히 지켜봐야 했다.
광복 이후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1961년 군사 쿠데타 이후 군부대가 경복궁에 주둔하게 되면서 신무문은 오랫동안 ‘보안과 경호’의 뒷전에서 굳
게 닫혀있어야 했다.
신무문이 어제 개방 행사를 치르고 45년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서울성곽 북쪽문인 숙정문의 개방, 청와대 뒷산의 단계적 개방 등과 맥을 같이 한다.
시민들은 신무문을 통해 경복궁을 드나들고 경복궁 돌담길의 정취를 더욱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시민들이 500년 넘는 역사적 사연을 간직한 신무문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연재 논설위원〉
조선왕조 정궁인 경복궁 4대문 중 유일하게 비공개로 남은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이 45 년 만에 개방됐다.
이로써 경복궁 권역은 사실상 온전히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 문화재청은 29일 청와대 본관 정문과 마주하고 있는 경복궁 신무문 현장에서 어린이, 시민, 문화재 관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신무문 개방 행사를 갖고, 이날부터 이 문을 일반 개방 했다. 문화재청은 "역사ㆍ문화적으로도 유의미한 청와대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공간을 국민의 품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북악산 개방과 함께 45년이라는 긴 세 월 동안 '보안과 경호'의 이유로 굳게 닫혀 있던 신무문을 개방키로 했다"고 말했다. 신무문 개방으로 경복궁은 청와대 앞길의 의장행사와 연계한 '원코스' 관람이 가능하게 됐 다. 문화재청은 이번 신무문 개방을 계기로 경복궁 돌담길을 자유롭게 걷고, 경복궁 관람의 접근 성을 높이게 됐으며, 4월 이후 시행 중인 청와대 앞길 의장행사와 북악산 숙정문의 연계된 관람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서울투어의 편의도 제고할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앞서 문화재청은 관계 부처와 협의를 거쳐 북악산을 포함한 서울성곽의 숙정문 일대를 필두 로 경회루(慶會樓)를 개방한 바 있다. 올 11월에는 광화문(光化門) 원위치 복원 사업에 들어가고, 이런 작업들을 토대로 서울의 옛 모습을 되살림으로써 서울을 유네스코 세계역사도시로 등재하기 위한 초석을 마련할 것으 로 기대하고 있다. 신무문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경복궁이 일반에 공개될 때 같이 공개됐으나 1961년 5.16 군사쿠테타 이후 군부대가 경복궁에 주둔하게 되면서 폐쇄됐다. 신무문은 정문이자 남문인 광화문(光化門),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서문인 영추문(迎秋門) 과 함께 세종 15년(1433년)에 창건됐으며, 성종 6년(1475년)에 네 방향을 관장하는 동물신 중 북쪽을 담당하는 현무(玄武)를 뜻하는 신무문이란 이름을 얻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되면서 같이 없어졌다가 고종 2년(1865년)에 경복궁 중건 과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중건 당시 한성부 판윤 조득림이 상량문을 썼고, 현판은 영건도감 부제조 이현직이 썼다고 기록돼 있다. 신무문 개방과 함께 신무문 동남측에 위치한 집옥재(集玉齋)와 협길당(協吉堂), 팔우정(八隅亭)도 일반의 품에 돌아왔다. 집옥재는 고종황제가 경복궁 북측 건청궁(乾淸宮)에 거처할 때 외국사신들을 맞이하거나 서재로 사용하던 곳이며, 팔우정은 서고로 쓰였던 팔각형태 건물이다. 협길당은 그 부속채이 다.
궁궐의 북쪽을 지키는 방위신인 현무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신무문의 개방으로 남문인 광화문의 주작과 동쪽 건춘문의 청룡, 서쪽 영추문의 백호와 함 께 경복궁 4대문 4방신의 격식이 완성됐습니다. 신무문과 함께 신무문 안쪽 지역인 집옥재 권역도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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