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형형한 실존에 대한 영화 <색, 계>
글 : 이동진 (이동진닷컴) | 2007.11.07 |
삶은 ‘지금 여기’와 ‘기타 등등’으로 나뉜다.
그러니까 <색, 계>는 육체의 형형한 실존에 대한 영화다. 생(生)의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치열한 길항작용에 대한 영화이고, 지루한 세월이 폭발하는 찰나에 맞서 힘겹게 싸움을 벌이는 영화다. 혹은 시간은 불균질하고 공간은 윤회한다. 그리고 삶은 ‘지금 여기’와 ‘기타 등등’으로 나뉜다.
1938년 홍콩. 대학 연극반에 가입한 왕치아즈(탕웨이)는 대륙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일본에 맞서 애국적 저항 활동을 벌이려는 광위민(왕리홍)에게 매료된다. 광위민이 친일파 핵심 인물인 정보부 대장 이(양조위)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이에 동조한 왕치아즈는 신분을 위장하고 미인계를 써서 이의 아내(조안 첸)에게 접근한다. 처음 본 순간부터 이와 왕치아즈는 서로에게 강렬히 이끌리지만, 급작스레 이가 상하이로 발령이 나 옮기는 바람에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1941년 상하이. 강력한 항일단체에서 활동하게 된 광위민이 평범한 생활로 돌아간 왕치아즈에게 3년 만에 찾아온다. 치밀하게 짜인 새로운 암살 계획을 듣고 왕치아즈는 다시금 이에게 접근한다.
리안은 몸이 일으키는 파장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쿵후 선생>에서 많은 일을 겪은 노인은 무술을 가르치며 마음을 다스리고, <라이드 위드 데블>에서 참혹한 전쟁을 치른 소년은 긴 머리카락을 자르면서 한 시절과 이별한다. <헐크>에서는 몸의 급격한 변형을 통해 마음의 극심한 혼란을 그려냈고, <음식남녀>에서는 미각의 변화를 빌려 가족의 의미를 재정립했다. 그리고 <아이스 스톰>에서 <브로크백 마운틴>을 거쳐 <색, 계>에 이르는 동안 리안의 어떤 영화세계는 점점 더 격정에 사로잡히고 있다.
<아이스 스톰>이나 <브로크백 마운틴>처럼 탁월한 리안의 대표작과 비교할 때, 사실 <색, 계>가 마냥 찬사를 연발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아마도 리안의 가장 뜨거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색, 계>가 제대로 통제된 우아한 스타일과 인상적인 몇몇 장면들을 지닌 매력있는 대중영화라는 점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모두가 이야기하는 <색, 계>의 베드신은 과연 강렬하다. 이 영화의 섹스신 연출은 파격적인 동작을 섬세하게 연결하는 일종의 ‘안무’라는 점에서 <와호장룡>의 무술장면 연출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영화의 에로스는 침대 위에만 존재하진 않는다. 왕치아즈가 커피를 마신 뒤 립스틱 자국을 잔에 남기거나 향수를 귀 밑에 슬쩍 뿌릴 때에도 리안은 카메라 뒤에서 큐피드의 화살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왕치아즈와 이가 온몸으로 만나는 세 차례의 장면은 폭력적이고 과시적이지만, 이야기 흐름이나 인물의 심리에 단단히 밀착되어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훌륭하다. 파격적인 섹스신이 있는 양조위 주연의 또 다른 영화는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였다. 그 작품에서 왕가위는 강도 높은 롱테이크 베드신을 영화의 첫 장면으로 삼았다. 리안은 <색, 계>에서 러닝타임 90분을 흘려보낸 뒤에야 일련의 강력한 베드신들을 모자이크하듯 묘사한다. 베드신의 영화 내 위치나 촬영 및 편집 방식의 차이는 왕가위와 리안이 어떻게 다른 영화적 지향점을 갖고 있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이글거리는 내면의 불을 차갑고 강인한 외양 속에 감춘 연기의 품질도 좋지만, 이 영화의 양조위에게 정말로 감탄스러운 것은 작품을 대하는 자세다. 탕웨이는 이 작품이 스크린 데뷔작이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입체적이고 고혹적이다.
<색, 계>에서 폭발적인 베드신 못잖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살의와 욕망이 교대로 휘몰아치는 격정의 순간이 어찌어찌 흘러간 뒤 홀로 남은 왕치아즈가 거리로 나서는 장면이었다. 인력거 뒷자리에 탄 채 한적한 거리를 잠시 달릴 때의 기묘한 정적. 경찰에 의해 길이 잠깐 통제되자 옷깃에 숨겨놓은 독약 캡슐을 만지작거리던 그녀 입가의 작고 짧은 미소. 이 무기력한 나른함이 주는 안온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
글 : 이동진 (이동진닷컴) |
“이 영화의 섹스는 증오와 사랑과 부정의 표출이다”글 : 정한석 | 2007.10.29
리안의 <색, 계>가 이번에도 황금사자상을 받을 거라고 예상한 건 아니었다. 이번에도 황금사자상을 탈 것 같냐고 어떤 기자가 공식기자회견장에서 물었을 때도 그는 그저 “나는 좋은 영화를 만든 것에 만족한다”고 답했을 뿐이다. 영화제 초반 현지 언론들의 호평을 받았지만 2년 만에 같은 감독의 영화가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건 확실히 흔치 않은 일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다시 또 베니스의 최고 영예를 누렸다. 하지만 우리는 애초부터 그가 상을 타거나 그러지 못하거나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며, 리안과의 이 단독 인터뷰는 이미 영화제 초반 9월1일 이루어졌다. 그를 만나러 데바 호텔에 간 날, 그는 막 서양 기자들의 라운드 테이블을 끝내고 조용한 걸음과 친절한 웃음을 띠고 <씨네21>쪽으로 넘어왔다.
시종일관 주의 깊게 귀를 세우고 세세한 대답을 들려주던 그는 “마지막 질문”이라며 칼같이 자르려는 영화사 직원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질문 하나를 더 받고 싶으니 물어보라고 할 만큼 친절했다. 결국 시간에 쫓겨 질문을 더 받지 못하자 그는 정말 많이 미안해했다. 우리가 만난 리안은 꼭 그의 영화만큼 섬세하며 겸손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 전날 술을 많이 먹어 사진은 못 찍겠다며 고사했는데, 황금사자상을 탔으니 영화제가 끝난 날 그는 아마 더 많은 술을 마셨을 것이다(본 인터뷰의 끝에 8월30일 있었던 <색, 계>의 공식기자회견 내용 중 리안의 대답만 따로 모아 첨부했다).
-당신은 ‘작가의 변’에 엘렌 창의 원작을 “각색”(adapt)한 것이 아니라 “재연”(re-enacted)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 말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그렇게 표현한 이유가 궁금하다
그래서 그녀의 내적 자아로, 그녀가 진정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자아의 이면으로 나는 들어가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영화적으로 삶을 펼쳐놓고 엘렌 창 원작에 있는 심연을 불러들인 것이다. 엘렌 창이 창조한 그 이미지를 재연(re-enact)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런 재연 작업은 내게 그녀의 삶이라는 덫 안에서 사는 듯한 기분을 주었다.
-(그래도) 원작과 차이를 둔 지점이 있을 듯하다. 있다면 어떤 것인가.
그건 너무 슬프지 않겠나. 단순히 방대한 분량을 짧은 시간 안에 보여줘야 한다는 실질적인 어려움만 얘기하는 게 아니다. 엘렌 창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인물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의 애국심과 그들이 하는 연극과 그 분위기를 모두 통감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책의 독자들은 아마도 각자의 상상력으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겠지만 영화는 직접 행동으로 보여줘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빈 곳을 채워야 했다.
빈 곳이란 원작자가 아주 심플하게 써놓은 부분을 포함하는데, 사실 소설에서 몇 페이지 정도는 내가 보기에 이야기의 흐름이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특히 1938년 홍콩에서 3년 뒤 상하이로 넘어가는 부분이 그런 곳이었다. 주인공 웡(탕웨이)이 일부러 스파이 노릇을 위해 처녀성을 버리고, 그리고 웡의 동료들은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데, 웡과 그 동료들이 이 사건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혹은 3년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나는 관객에게 납득시켜야 했다.
또 동료들이 상하이에서 만난 웡을 어떻게 다시 설득시켰는지도 말이다. 우리는 이 모든 간극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정말 여러 가지 경우를 시도했다. 덧붙여 전반적으로 말하자면 영화의 스토리가 제대로 작동하게 하려면 결코 영화의 리듬과 구조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좀더 드라마틱하지만 덜 산문적인 느낌이 나도록 신경 썼다.
-많은 부분이 상하이를 무대로 하고 있다. 상하이에서의 촬영은 어땠나.
상점이 있었던 자리를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서 말이다. 정확히 그때 182개의 상점들이 있었다. 심지어 나무조차도 1942년의 나무 크기를 그대로 재현했다. 지금 상하이의 플라타너스 나무들은 아주 크고 굵직한데 1942년에는 이 나무들이 훨씬 작고 더 가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당시의 사이즈에 맞춰 새로운 나무들을 심어야 했다.
-이 영화를 구상할 때 당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어떤 것이었나.
나는 탕웨이를 처음 보는 순간 이 역할에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디션을 통해 수만명의 여배우 중에서도 탕웨이를 뽑아 오랫동안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한 것이었다. 촬영 전 3개월, 그리고 촬영하는 5개월 동안 매일매일이 그녀에겐 트레이닝이었을 거다. 이런 내용들이 내가 영화를 만들면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들이었다.
-당신은 신인배우 탕웨이의 경력보다 가능성을 본 것인가.
-제작자 제임스 샤머스는 원작자 엘렌 창이 여러 면에서 제인 오스틴과 닮았다는 흥미로운 말을 했다. 제임스 샤머스의 그 말에 기대 묻는다면, 당신은 서양의 제인 오스틴과 동양의 제인 오스틴(엘렌 창)의 원작을 동시에 영화로 만든 유일한 감독인 것 같다. 당신 생각으로는 두 소설가의 공통점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엘렌 창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게 <색, 계>인가.
-단편소설을 장편영화로 만드는 건 아주 힘든 작업이라고들 하던데, <브로크백 마운틴>도 그렇고 당신은 그걸 아주 잘해내는 것 같다.
-당신은 그 간극을 채우는 걸 즐기는 타입 같다.
-특별히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우리(중국) 영화계에는 아직까지 세세한 부분을 담당하는 전문가가 없어서 감독으로서 정말 많은 사항들을 하나하나 신경 써야 했다. 행동과 언어, 악센트까지… 모든 것을 말이다. 아주 피곤한 일이었다. 미국에서 작업할 때는 외국인 감독이어도 이 정도로 힘들지는 않다. 여기(중국)서는 모두가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심지어 명함까지도 날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웃음)
-지금까지 당신은 많은 러브스토리를 다뤄왔지만 ‘섹스장면’을 격렬하게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동안 당신 영화의 사랑은 ‘감정의 러브스토리’였다. 이번에는 강렬한 섹스신을 피하지 않고 직접 보여주었다. 단순히 ‘창작 작업에 있어서 추구한 변화’라는 넓은 의미 이외에 처음으로 당신이 배우의 ‘육체성과 섹슈얼리티’를 도전적으로 다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변화는 어디에 기인한 것인가.
-당신은 “제인 오스틴의 원작을 갖고 만든 <센스, 센서빌리티>의 시대를 재현하는 것이 지금 1940년대 상하이를 재현하는 것보다 쉬웠다”고 했는데 그건 어떤 의미에서 한 표현인가.
기술적인 측면에서 미국의 제작 수준을 이곳으로 끌어오기엔 힘들었다. 또한 내 조국인 대만은 중국 본토와 분리되어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중국은 미국보다 훨씬 긴 역사와 방대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다. 내 고향, 내 문화적 뿌리인데도 이해하기가 힘든 부분이 더러 있었다. 어머니가 쓰시는 언어도 잘 못 알아들을 정도니 말이다. 영화 한편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렇게 수많은 측면을 알아야 한다.
-(전작 <브로크백 마운틴>을 촬영하기도 한 훌륭한) 촬영감독 로드리고 프리에토와 어떤 점을 주로 상의했는가. 그는 당신이 양조위를 비출 때는 특정한 “킬러 라이트”(killer light)를 요구하거나 전체적으로는 이 영화에 “필름누아르 룩”을 요구했다고 하던데. 우선 “킬러 라이트”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건 어떤 점에서 필요했는가.
-그럼 영화 전체적으로 필름누아르 룩을 요구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이었나
그러나 40년대 누아르처럼 지나치게 음영을 많이 주기보다는 현대 누아르처럼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하려 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미스터리한 느낌을 주기 위해 카메라의 심도와 초점을 다양하게 조절한다든지 말이다. 그런 건 우리가 원작을 발전시키는 단계에서 시도했던 새로운 접근방식이었다.
-마지막 질문이다. 1942년 상하이가 영화의 주배경이다. 과거 허우샤오시엔과 관금붕 역시 엘렌 창의 다른 소설을 <상하이의 꽃>(Flowers of Shanghai)과 <레드 로즈, 화이트 로즈>(Red Rose, White Rose>로 영화화한 바 있다. 각각 양조위는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에, (<색, 계>에서 양조위의 부인으로 나오는) 조안 챈은 관금붕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우리는 허우샤오시엔이나 관금붕과 달리 당신이 생각한 1940년대 상하이란 어떤 곳이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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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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