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에 우선 순위를 매긴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순위 안에 들게 되면 가일층 관심을 받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기업의 규모를 5대니 10대로 구분하고 연말이면 10대나 20대로 그 뉴스의 사회적 비중과 관심을 판가름한다.
기업의 규모나 뉴스의 비중을 몇 대로 구분하듯 수많은 절 중에도 통상적으로 삼보사찰, 4대 관음도량, 5대 적멸보궁 등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산사를 찾아 혼탁한 심신에 자정의 기회를 갖는 것도 좋지만 비중 있게 분류되는 성지를 한번에 둘러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그 동안 어느 매체에서 삼보사찰이나 4대 관음도량, 5대 적멸보궁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자료를 제공하였던 적이 있었나 확인을 하진 못했지만 일년 가까이 산사를 소개해 온 입장에서 끝마무리로 이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적멸보궁은 불가에 있어 성지 중의 성지다. 부처님 생전에는 별도의 법당도 경전도 필요 없었을 거다. 부처님이 머물고 설법을 하면 그곳이 곳 법당이고 경전일 테니 말이다. 불교는 "스스로 깨우침"을 지향하는 종교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다 보니 심신과 눈을 통해 깨우침을 주고 심신의 의지처를 찾게되니 이런저런 형태의 불상과 불구가 등장하여 안내자며 수호자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다 보니 부처님의 진신사리야말로 최고의 신앙대상일 수밖에 없다.
적멸보궁은 부처님 몸체에서 나온 불사리를 모신 곳이니 석가모니 진신이 상주해 계신 것을 의미한다. 부처님 진신을 모신 것을 상징하는 곳이니 법당에는 별도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는 게 적멸보궁의 외형적 특징이다. 적멸보궁엔 불상이 별도로 모시지 않다는 걸 알지 못한 채 적멸보궁을 들렸다 방석만 덩그러니 놓여진 걸 보고 조금 황당해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적멸보궁 바깥쪽 어딘가에 사리탑을 세우거나 계단(戒壇)을 만들어 봉안한 경우가 대부분이니 방석이 놓여진 뒤쪽에 창이 나 있는 경우 그 창을 통하여 사리탑이나 계단을 볼 수 있을 수도 있다.
통도사는 일주문을 지나 안쪽 깊숙한 곳에 대형 금강계단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해 삼보사찰 중 불보종찰이 됐다.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을 받들어 기도하고 예불을 올릴 수 있도록 계단 앞쪽에 세워진 고색 창연한 전각의 전면에는 "金剛戒壇"이란 편액이 달려있고 동쪽 측면에 "大雄殿", 서쪽 측면에는 "寂滅寶宮"이라고 쓰여진 편액이 걸려 있다.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 말사인 상원사 중대의 적멸보궁은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의 주처"라는 생각에서 부처님 사리를 모신 성지다. 이곳 적멸보궁의 불사리는 어디에 봉안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다만 보궁 뒤에 1m 높이의 판석에 석탑을 모각한 마애불탑이 상징적으로 서 있을 뿐이다.
영월에 있는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은 대웅전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다. 보궁 뒤에는 진신사리가 안치되어 있다는 보탑이 서 있고, 그 옆에 자장율사가 도를 닦았다는 토굴도 있다. 강원도 정선의 태백산 정암사에도 5대 적멸보궁 중 한 보궁이 있다. 자장율사가 현몽한 문수보살의 지혜를 받아 태백산맥 자락에 정암사를 창건하여 보궁과 함께 칠보 중 하나인 마노석으로 쌓은 "수마노탑"이 천의봉 중턱에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 4교구본사 월정사 말사인 상원사(上院寺)는 한 때 진여원(眞如院)으로도 불렀다 한다. 쭉 곧은 전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월정사와 상원사 진입로는 많은 사람들이 산사 초입의 진미로 예찬한 바 있다. 한마디로 가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주변의 풍경을 묘사한 글을 읽으며 사진을 본다 해도 스치는 바람의 상큼함과 숲에서 우러나는 자연의 진솔한 향긋함은 느낄 수 없다. 상원사 진입로에서 느끼게 되는 오묘한 행복감은 연출할 수도 묘사할 수도 없는 자연만의 전유물이며 위대함이다. 오감에 감성을 더한 육감의 만족감과 행복감은 찾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땀과 발품의 보상이 분명한 곳이다.
창건사와 얽힌 설화는 널리 알려지기도 했지만 6·25전쟁 중 전소의 위기에서 절을 지켜낸 스님들의 불심과 어느 장교의 슬기로운 처세가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국군이 북으로 진격하며 절이 공비의 소굴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소각하려 했었다고 한다. 군인들이 절을 불에 불을 붙이려하자 한암 중원이란 스님은 법당에서 염불을 시작했다고 한다. 아무리 전시지만 사람이 들어있는 곳에 그냥 불을 지를 수는 없어 스님을 밖으로 나오라고 말하니 스님께선 "그냥 불을 질러라. 당신들이 군인의 본분에 따라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듯 절을 지키는 것은 승려의 본분이다. 마지막까지 승려의 본분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말하곤 염불을 계속했다고 한다.
상원사에서 적멸보궁을 참배하기 위해서는 꽤나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한다. 한두번 쉴 거라는 마음으로 가면 힘들 것도 없는 곳이다. 월정사는 5대 적멸보궁 중 상원사와 정암사 외에도 한곳의 적멸보궁이 있어 5대 적멸보궁의 절반 이상을 말사로 두고 있는데 그 중 한곳이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하나이기도 한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에 있는 사자산 법흥사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절들은 좋은 산들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다. 법흥사 역시 풍치 좋은 사자산에 자리를 잡았다. 절을 찾아 경전에 나오는 좋은 말들을 되뇌며 심신을 어르고 순화시키는 것도 좋지만 그냥 목적 없이 찾아도 좋은 곳이 좋은 산에 있는 좋은 산사니 그런 곳 중 한 곳이 바로 사자산 법흥사다.
출처: 불국정토 |
영월 사자산 법흥사
자장(慈藏)이 643년(신라 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와 태백산 정암사(淨岩寺), 영축산 통도사(通度寺),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등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이 절을 창건하여 역시 진신사리를 봉안했으며, 이름을 흥녕사라고 했다.
그 뒤 헌강왕 때(875-886) 징효 절중(澄曉 折中)이 중창하여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사자산문(獅子山門)의 중심 도량으로 삼았다.
당시 헌강왕은 이 절을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켜 보살핌을 받도록 했다. 그러나 891년(진성여왕 5) 병화로 소실되었고, 944년(고려 혜종 1) 중건했다.
그 뒤 다시 불에 타서 천 년 가까이 작은 절로서 명맥만 이어왔다. 1902년 비구니 대원각(大圓覺)이 중건하고 법흥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2년 다시 소실된 뒤 1930년 중건했으며, 1931년 산사태로 옛 절터의 일부와 석탑이 유실되었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 중의 한 곳으로서 대표적인 불교 성지이다.
사자산문(師子山門)
신라말의 고승 쌍봉선사(雙峰禪師) 도윤(道允)과 그의 제자 절중(折中)에 의해 개창된 산문이다. 도윤은 825년 당나라로 건너가 남전보원(南泉普願)에게서 법을 배웠다. 847년 귀국해서 능주(綾州?화순) 쌍봉사(雙峰寺)에서 크게 선풍을 일으켰다. 도윤의 뒤를 이은 절중(折中)이 영월 사자산(獅子山) 흥녕사(興寧寺)에 자리를 잡고 산문을 열었다. 신라말기 징효(澄曉)때 가장 번창했다. 944년에 건립된 그의 탑비인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는 보물 제612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흥녕사는 891년 화재로 사라진뒤 944년 다시 중건했으나 역시 화재로 회진되었다. 이후 1천년이 넘도록 폐사로 있었다. 이후 1902년 비구니 대원각(大圓覺)이 중건하고 법흥사(法興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로도 소실과 중건을 거듭했다. 흥녕사는 절이름처럼 그리 흥녕(興寧)하지 못한 것 같다.
희양산문(曦陽山門)
희양산문은 고려 태조 18년인 935년에 정진국사(靜眞國師) 긍양(兢讓)이 문경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에서 개창한 산문이다. 희양산문의 개조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선문조사예참의문(禪門祖師禮懺儀文)에 따르면 지증도헌(智證道憲)이 개산조사로 되어 있다. 긍양이냐 지증국사 도헌이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하지만 긍양개산조사파에선 도헌이 봉암사를 먼저 세우기는 했어도 그를 희양산문의 개산조사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도헌이 북종선의 맥을 이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에 대한 결론은 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사례로 보건대 도헌과 긍양 어느 쪽으로도 쉽사리 무게중심이 옮겨 갈 것 같지는 않다. 긍양은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의 신뢰와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형초 등 많은 제자를 거느려 희양산문의 선풍을 확립했다. 봉암사는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다. 이곳에는 보물 제169호인 삼층석탑을 비롯, 보물 제137호인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 보물 제138호인 지증대사 적조탑비, 보물 제171호인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 보물 제172호인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봉암사는 한국의 대표적인 참선승방이다. 그래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다. 사찰은 초파일에만 개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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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선문】참선기행: 사자산문 |
천년만에 다시피는 찬란한 한국禪 -흥녕선원 복원불사 추진한창- -불사리탑 자장스님 토굴 보존- 교“불의 모든 길은 선(禪)으로 귀결됩니다. 참선을 통해야만 오도할 수 있고, 수행의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안정, 선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수행도 할 수 없어요. 여기 부처님 궁전에 들어 왔으니, 화두 있는 이는 화두잡고, 화두 없는 이는 부처님과 한번 만나 보시오. 세세생생 큰 인연이 될 터이니…”5일 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현대불교신문이 기획한 ‘구산선문 참선기행’의 마지막 답사지인 이곳에서 참가자들은 법흥사 구담(九潭)스님의 가르침을 곱씹으며 저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사자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법흥사(주지 도완)는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발상지이자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한곳이다. 자장율사가 문수보살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강원도 세곳을 돌며 사리를 봉안하고 기도를 하다가 맨 마지막에 이곳에 들러 적멸보궁을 지었다 전한다. 처음 이절의 이름은 흥녕사(興寧寺)였다. 사자산문의 개조인 철감선사 도윤(道允)스님의 제자인 징효대사 절중(折中)스님이 흥녕선원을 열어 선종의 구산선문 가운데 사자산파의 중심도량이 되면서 크게 선풍을 떨쳤다. 당시 신라의 헌강왕은 이 절을 중사성에 예속시켜 사찰을 돌보게 할 정도로 지극한 관심을 보였는데, 구산선문이 번창할때는 2천여명이 넘는 스님들이 수행했으며, 공양준비를 위해 쌀을 씻으면 10여리밖에 떨어진 수주면 무릉도원까지 그 물이 흘러갔다고 한다. 그러나 흥녕선원은 거듭되는 병화로 소실된 뒤 천년 가까이 소찰로서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大圓覺)스님이 중건하고 법흥사로 개칭했다. 법흥사는 천년전 선문대찰의 면모를 다시 살리기 위한 불사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사찰 곳곳에 목재와 석재들이 흩어져 있어, 조금은 어지러워 보이지만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과 정성이 곳곳에서 배어났다.
법흥사 극락보전 옆 보물 제612호로 지정된 징효대사 보인탑비에는 헌강왕때 흥녕선원을 개설해 선풍을 일으키고, 요선암에서 입적한 스님의 행적이 기록돼 있다. 징효스님은 “삼계(三界)가 다 공하고 모든 인연이 전부 고요하다. 내 장차 떠나려 하니 너희들은 힘써 정진하라. 부디 선문을 수호하고 종지(宗旨)를 무너뜨리지 말아서 불조(佛租)의 은혜를 갚도록 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한 뒤 앉은 채로 입적했다 한다. 이 부도비는 병화로 소실된 흥녕사가 중건되던 해인 944년에 세워졌다. 비신의 높이가 2.77m 너비 1.44m이며 형식은 귀부위에 비신을 올려놓고 그 위에 이수로 덮은 신라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석비다. 극락전 위로 200여 m를 올라가면 적멸보궁이 자리잡고 있다.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29호로 지정된 법흥사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단칸의 목조건물이다. 적멸보궁 좌측 뒤에는 자장율사가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는 토굴(석실)이 있고, 좌측에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진신사리를 넣어 사자등에 싣고 왔다는 석함(石函)과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이 서 있다. 적멸보궁뒤로 높이 서있는 사자산에는 백의관음상과 석가모니불, 달마대사 등 소나무와 기암괴석사이로 수많은 불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보는이의 눈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이 불상은 사자산의 자랑이기도 하다. 2천여명의 스님들이 수행했다는 흥녕선원지(興寧禪院址)는 법흥사 아래쪽 민가옆에 위치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사자산문의 중심수행지이었던 이곳은 현재 주춧돌과 이름모를 스님의 부도 1기만 남아 그 시절을 어렴풋이 짐작케 한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흥녕선원지에 선 기행단들은 “지금은 이렇게 황량한 터만 남아있지만 앞으로 수년내에 이곳에 국내외 스님과 불자들이 수행할 수 있는 선도량을 일궈낼 것”이라는 법흥사 선학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한마음으로 합장기원했다. 한국선의 정통 맥이 계속 이어지고, 수많은 수행자의 땀방울속에 한국불교가 세계로 뻗어나갈 그날을… 8차례 답사…구산선문 복원 필요성 절감 결 산 한국불교의 선맥을 따라 지난 4월~12월까지 8회에 걸쳐 실시한 ‘구산선문 참선기행’은 사자산 법흥사를 마지막으로 회향했다. 4월 가지산문 보림사를 시작으로, 5월 실상산문 실상사, 6월 사굴산문 굴산사지, 7월 동리산문 태안사를 참배했으나, 9월 희양산문 봉암사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방문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10월 봉림산문 봉림사지, 11월 성주산문 성주사지, 12월 사자산문 법흥사를 돌며 한국 전통 선맥의 흐름을 살펴보며 신심을 다지고, 한국불교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구산선문 가운데 희양산문과 동리산문을 제외하고는 선문의 면모를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는 곳이 없어 안타까웠다. *사자산 현재 사자산문과 가지산문, 실상산문은 그 명맥은 이어오고 있으나 선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으며, 사굴산문, 봉림산문, 성주산문 등은 절터만 남아있어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한 구산선문의 복원이 시급함을 다시한번 실감케 했다. 더불어 남북분단으로 미처 찾아가지 못한 수미산문 광조사지는 통일된 그날, 다시 찾아갈 것을 기대한다. 징효대사흥녕선원 개창주 흥녕선원을 일으킨 징효대사의 법명은 절중(826~900)으로 황해도 봉산 출신이다. 사자산문의 흥녕선원을 번창시킨 장본인이다. 중국 당나라 마조의 수제자 남전선사에게서 법을 받고 돌아온 도윤스님 밑에서 16년간 수도했다. 스님은 철감국사 도윤에 이은 사자산파의 제2조로서 화엄학의 무애법계연기(無碍法界緣起)에 입각한 깨달음을 터득했다. 화엄학에서 출발해 선의 세계에 들어간 것은 우리나라의 선이 후대에 화엄학과 깊은 관련을 가지게 된 특징이기도 하다. 수호마애상 성지 요선정 지켜 흥녕선원의 수호불상이라 불리 운 마애여래좌상(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74호)은 영월군 무릉리에 있는 요선정(邀僊亭) 옆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져있다. 요선정은 징효대사가 열반한 곳으로 1천여개의 사리가 나왔다는 불교와 인연깊은 곳이다. 요선정의 수호마애좌상은 타원형 얼굴의 풍부한 양감과 크고 듬직한 코와 귀, 상체에 비해 작은 하체 등 전반적으로 불균형한 형태이나 친숙한 미소와 힘찬 기상이 잘 표현된 이 지방의 대표적 마애불상이다. 보덕사 단종 기리는 원찰 신라 문무왕(668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지덕사 라 불렀다. 1457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유배되었을때는 노릉사(魯陵寺)로 고쳐 불렀으며, 단종이 승하한 후 보덕사로 개칭해 단종의 영혼을 기리는 원당사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23호로 지정된 극락보전을 비롯 사성전, 칠성각, 부속암자인 금몽암 등이 있다. 글: 이은자 기자 (ejlee@buddhapia.com) <현대불교미디어센터 ⓒ 2005> |
[구산선문 참선기행]희양산문 - 봉암사 |
587년 어느날 사불산(913m) 산마루에 사방을 비단으로 감싼 바위가 하나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펼쳐보니 사방에 여래상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신라 진평왕이 현장을 살펴보고는 감탄한 나머지 대승사를 짓도록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걸맞다. 대승사는 사불산 분지에 한폭의 그림같이 아늑하게 안겨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부처님을 떠받드는 연꽃을 땅에서 피게한 대승사에는 대웅전에 보물 제575호 목각탱이 있다. 이 목각탱은 원래 부석사 무량수전 후불탱으로 국내 현존 6개 목각탱중 하나다. 아침공양을 마친 불자들은 대웅전에서 주지 탄공스님에게 대승사의 창건유래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개산조인 망명(亡名)스님은 늘 묘법연화경을 외우고 다녔는데 어느날 한밤중에 괴이한 빛이 넘치는 지라, 자세히 보니 망명스님의 입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소문이 서라벌까지 번져 진평왕이 비구 망명에게 청하여 대승사 주지로 삼아 대승사의 받침돌을 깨끗히 씻어 향불을 끊이지 않게 했다고 한다. 대웅전 옆에는 선원이 있는데 올해 하안거에 27명의 수행납자가 안거를 났다고 한다. 선원장스님의 특별배려로 참가자들은 선원에 들어가 그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1호)에 참배하였다. 이 기회에 대승사 신도들도 함께 참배했는데, 포항의 한 거사는 3년간 대승사를 다녔지만 선원에 들어가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기뻐했다.
대승사에서 남서쪽으로 운달산(1,099m) 남쪽기슭에 앉아있는 김용사(주지 자광)는 고색창연한 향내를 자아내고 있다. 원래 31본산의 하나였던 김용사는 한때 경북 북부지역의 46개 사찰을 관장했었다. 본지 사고에 안내를 맡기로한 주지 자광스님은 당초 김용사에 대한 안내였다. 봉암사 참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는데 오해를 불러일으켜 스님께 죄송했다. 김용사 대웅전은 1649년에 설잠대사가 조성한 건물로 목조석가여래와 약사여래, 아미타여래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내부의 단청이 대단히 화려한데 천정에는 온갖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상의 자태가 아름답다. 또 괘불은 10m로 대형인데 주존불이 중앙에 꽉차도록 자리잡고 있으며 양옆으로 협시보살과 사천왕이 둘러싸고 있고 바깥쪽으로 10대제자, 인왕, 팔부중이 줄을 선듯한 모습으로 둘러서 있다. 근대에 들어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성철 서옹 서암 스님을 배출한 성지로도 이름높다. 김용사는 옛사격의 복원을 염원하며 60평이나 되는 국내최대 온돌방의 복구공사, 설선당, 해운암등 3개의 당우를 건립하고 있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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