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대학미술협의회 기획展
헤드라이트 ● “나를 내버려 두란 말이예요, 나는 깊이가 없어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 대학미술교수협의회에서 마련한 이번 기획전시는 매년 수도권 대학의 대학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을 선별해 최근 대학 미술의 현황을 살펴보는 한편 이들로부터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희미하게나마 감지해 보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를 통해 현재 대학에서의 미술교육이란 무엇이며 무엇일 수 있는지, 그것이 학생들의 작업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지 등을 살펴보려는 의도 역시 자리하고 있다. 각 대학에 재직 중인 교수님들로부터 대학별로 1명씩 추천을 받았다. 추천에 대한 기준은 특별한 게 없지만 가장 뛰어난(?) 학생들은 선별해달라는 요구가 암묵적으로 있었을 것이다. 올 해 추천된 학생들의 작업은 대부분 회화작업이었으며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작업 경향과 일치하는 몇 가지 징후들이 감지된다. 지극히 사적이며 개인적인 감성과 감각에 우선하는 그림, 반유토피아적 정서, 상상력과 환상이 교차하는 기이한 상황에 대한 관심, 서사에 대한 욕망, 자폐적이고 자기애적인 그리기에의 몰입, 일종의 고현학적인 관심, 그리고 극사실과 팝 적 그림에 대한 기호 등이 몇 겹으로 겹쳐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지닌 짙은 염세성은 매우 충실하고 정직한 자기 반영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머와 유희 정신 속에도 지독한 체념과 허무와 무상감이 잠재되어 있다. 그런가하면 이들에게 친숙한 사이버 공간은 ‘허구로 가득 찬 불온한 가상이 아니라 결함이 제거되어 제어 가능한 이데아의 현현’이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익숙해진 성장 환경에 따라 상상이나 환상의 구성에 능란하다. 기계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듯 환상의 공간은 현실의 남루함을 지워주고 억압을 풀어주고 막막한 욕구를 해소시켜준다. 그러나 자신이 창조한 환상, 이데아 역시 자신을 소외시킨다. 그래서 ‘가상 세계의 환상성에 존재의 일부를 희석해 현실 속 자아를 그 정도 만큼 지워내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미술은 세상에 대해 말해주는 그런 텍스트가 아니다. 이제 미술은 그저 세상 가운데에 있을 뿐이다. 미술을 통해 현실의 정수를 본다거나 내면의 투사를 수렵한다는 식의 정의는 이제 무의미하다. 이들은 현실을 염두에 두지 않은 상상력으로 현실을 조롱하고 넘어서거나 그 불가해함을 조감할 뿐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취 속에는 여전히 이들에 의해 포착되는 동시대의 현실과 동시대인의 운명이 감지된다. 그러나 그것은 깊이의 세계가 아니라 표면의 세계이다.
박미경_a Sabbath of the tomb_종이에 잉크_100×72cm_2004
홍원석_낯선여행_혼합재료_97×193cm_2007
동시대 한국미술계는 급속한 외형적 성장과 국제화를 이루어내었다. 그 속도와 변화의 폭과 넓이는 다른 시간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현재진행형인 서구미술사조의 신속한 유입과 지적 담론 역시 일정한 상식의 수준으로까지 받아들이고 논하게 되었으며 이른바 국제주의적 스타일이 유행되고 있다. 이런 변화는 그간의 20세기 미술을 지배해온 시각적 패러다임, 혹은 한국현대미술을 지탱해온 몇 가지 범주들을 과감하게 뛰어넘고 벗어난 결과이다. 동시대 미술의 주역들은 무엇보다도 기성세대의 미술관, 권력화 된 구조를 지운 자리에서 서식한다. 더 이상 미술에 있어서 평면성, 환원주의, 강령적인 민중미술의 내용과 형식, 장르의 결벽성, 신화적 작가상, 순수주의와 아방가르드 개념은 힘을 상실했다. 이는 미술 자체의 의미 변화를 진단하는 이론들 및 형식의 붕괴, 그리고 시각을 넓혀 그것이 거주하는 제도 공간, 즉 미술관, 미술시장, 미술정책 등을 다시 보는 제도비판 담론들을 통해 제기되는데 힘입은 바 크다. 무엇보다도 ‘중심의 상실’ 이후, 자신을 시대,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고 그 의미의 짜임을 탐색하고 이를 작업화 해내고 있는 작가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주된 전략이 되었고 미술의 문제가 되었다. 그런가하면 독특한 시각의 미술을 보는 눈, 재미난 아이디어와 개념의 신선함을 보여준 전시들이 이루어진 한 켠에는 갖가지 수사학으로 표현되는 문화다원주의의 여러 이론과 논의들이 화가들의 작업 속에 여과 없이 반영되는 한편 오늘날 서구의 세기말 상황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논의들을 부여잡아 자신의 트렌드로 삼아 작업으로 만들어내면서 평론가, 큐레이터들의 관심을 자극하고 자신을 과시하는데 급급해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같은 흐름은 미술의 문제보다 생존논리, 정치논리가 앞선 우리들의 불우하고 남루한 미술계의 여건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벤트적이고 센세이셔널리즘 같은 자극적이고 단발적인 것들이 지겨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는 또한 매체가 조장하는 측면도 크다. 우리에게 있어 미술기사, 문화면이란 늘상 이런 신기한 이벤트, 통속적인 대중주의에 사로잡혀있지 않은가? 그래서 오늘날 ‘뜨는 작가’들은 그 같은 매체의 속성을 적절히 활용하고 자신을 그 틀에 탈렌트적으로 맞추고 디스플레이 한다. 그런 면에서 튀는 작업, 요즘 유행하는 주제나 이슈(미술의 문제라기보다는 문화적인 내용들)를 끌어들인 작업, 최근 기획전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작가들을 흉내 내는 작업, 전시자체를 이벤트화하기, 미술평론가나 큐레이터들에 의해 선호되는, 그러니까 더 쉽게 언어로 환원될 수 있는 것, 그들의 빈곤한 상상력에 어필하는 작품들을 고안해내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래서 작가들은 자꾸만 특정한 주제의식, 담론으로 무장되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탈이념과 반유토피아의 한 축에는 역으로 미술계 권력의 중심을 지향하는 아이러니가 동시에 발생한다. 그러나 작가란 존재는 기존의 담론을 추종하거나 그 논리에 함몰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담론을 창출해내거나 지속해서 이를 넘어서는 이들이다. 작가 스스로, 자신이 아니면 결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 감각 말이다. 그리고 이 같은 감각과 자의식이 동시대 젊은 작가들에게 일정부분 공유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원정연_anything drawer_캔버스에 유채_145.5×97.0cm_2006
이지현_nature2_캔버스에 유채_116×74cm_2007
미술이 제도화의 메카니즘 속에서 권력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고 모든 것이 상품으로 전화되는 오늘날 과연 그림이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는 지에 대한 물음을 회피하지 않으려는 자세는, 여전히 작가들에게 요구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는 각자 한 작가의 고유한 개인성, 자신만의 감각과 언어를 통해 돌파해나갈 문제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젊은 학생들의 작업이 어둡고 습한 우리 미술계에 하나의 전조등(Headlights)이 되기를 기대한다. ■ 박영택
박미경_a Sabbath of the tomb_종이에 잉크_100×72cm_2004
홍원석_낯선여행_혼합재료_97×193cm_2007
동시대 한국미술계는 급속한 외형적 성장과 국제화를 이루어내었다. 그 속도와 변화의 폭과 넓이는 다른 시간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현재진행형인 서구미술사조의 신속한 유입과 지적 담론 역시 일정한 상식의 수준으로까지 받아들이고 논하게 되었으며 이른바 국제주의적 스타일이 유행되고 있다. 이런 변화는 그간의 20세기 미술을 지배해온 시각적 패러다임, 혹은 한국현대미술을 지탱해온 몇 가지 범주들을 과감하게 뛰어넘고 벗어난 결과이다. 동시대 미술의 주역들은 무엇보다도 기성세대의 미술관, 권력화 된 구조를 지운 자리에서 서식한다. 더 이상 미술에 있어서 평면성, 환원주의, 강령적인 민중미술의 내용과 형식, 장르의 결벽성, 신화적 작가상, 순수주의와 아방가르드 개념은 힘을 상실했다. 이는 미술 자체의 의미 변화를 진단하는 이론들 및 형식의 붕괴, 그리고 시각을 넓혀 그것이 거주하는 제도 공간, 즉 미술관, 미술시장, 미술정책 등을 다시 보는 제도비판 담론들을 통해 제기되는데 힘입은 바 크다. 무엇보다도 ‘중심의 상실’ 이후, 자신을 시대,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고 그 의미의 짜임을 탐색하고 이를 작업화 해내고 있는 작가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주된 전략이 되었고 미술의 문제가 되었다. 그런가하면 독특한 시각의 미술을 보는 눈, 재미난 아이디어와 개념의 신선함을 보여준 전시들이 이루어진 한 켠에는 갖가지 수사학으로 표현되는 문화다원주의의 여러 이론과 논의들이 화가들의 작업 속에 여과 없이 반영되는 한편 오늘날 서구의 세기말 상황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논의들을 부여잡아 자신의 트렌드로 삼아 작업으로 만들어내면서 평론가, 큐레이터들의 관심을 자극하고 자신을 과시하는데 급급해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같은 흐름은 미술의 문제보다 생존논리, 정치논리가 앞선 우리들의 불우하고 남루한 미술계의 여건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벤트적이고 센세이셔널리즘 같은 자극적이고 단발적인 것들이 지겨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는 또한 매체가 조장하는 측면도 크다. 우리에게 있어 미술기사, 문화면이란 늘상 이런 신기한 이벤트, 통속적인 대중주의에 사로잡혀있지 않은가? 그래서 오늘날 ‘뜨는 작가’들은 그 같은 매체의 속성을 적절히 활용하고 자신을 그 틀에 탈렌트적으로 맞추고 디스플레이 한다. 그런 면에서 튀는 작업, 요즘 유행하는 주제나 이슈(미술의 문제라기보다는 문화적인 내용들)를 끌어들인 작업, 최근 기획전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작가들을 흉내 내는 작업, 전시자체를 이벤트화하기, 미술평론가나 큐레이터들에 의해 선호되는, 그러니까 더 쉽게 언어로 환원될 수 있는 것, 그들의 빈곤한 상상력에 어필하는 작품들을 고안해내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래서 작가들은 자꾸만 특정한 주제의식, 담론으로 무장되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탈이념과 반유토피아의 한 축에는 역으로 미술계 권력의 중심을 지향하는 아이러니가 동시에 발생한다. 그러나 작가란 존재는 기존의 담론을 추종하거나 그 논리에 함몰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담론을 창출해내거나 지속해서 이를 넘어서는 이들이다. 작가 스스로, 자신이 아니면 결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 감각 말이다. 그리고 이 같은 감각과 자의식이 동시대 젊은 작가들에게 일정부분 공유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원정연_anything drawer_캔버스에 유채_145.5×97.0cm_2006
이지현_nature2_캔버스에 유채_116×74cm_2007
미술이 제도화의 메카니즘 속에서 권력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고 모든 것이 상품으로 전화되는 오늘날 과연 그림이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는 지에 대한 물음을 회피하지 않으려는 자세는, 여전히 작가들에게 요구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는 각자 한 작가의 고유한 개인성, 자신만의 감각과 언어를 통해 돌파해나갈 문제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젊은 학생들의 작업이 어둡고 습한 우리 미술계에 하나의 전조등(Headlights)이 되기를 기대한다. ■ 박영택
출처 : 작은나무의 블로그
글쓴이 : 작은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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