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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風景

길을 묻다

by 진 란 2007. 1. 11.
겨울바다는 꽃에게, 꽃은 겨울바다에게 길을 묻다

[달팽이가 만난 우리꽃 이야기 80]

         종달리 바닷가의 갯쑥부쟁이

     김민수(dach) 기자   
▲ 지난 겨울을 추억하며 - 종달리해안도로의 눈오는 날 풍경
ⓒ 김민수
지난 겨울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좀처럼 눈오는 풍경을 볼 수 없었던 제주의 바다는 내가 그 곳에서의 마지막 겨울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하얀 눈이 쌓인 바다를 이별선물로 주었다. 바람이 많아 돌담 옆으로 눈이 쌓이곤 했는데 그 날은 함박눈이 보슬보슬 내렸다. 바람이 잠들자 눈이 깨어난 것일까?

겨울바다는 외롭지 않았다.
겨울바다에 대한 노래와 시, 그리고 무엇보다도 철 지난 꽃들일지라도 겨우내 그들과 더불어 피어 있는 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라는 노랫말처럼, 바다는 한 겨울에도 피어 있는 꽃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그리고 그 바다에는 갯쑥부쟁이들이 어우러져 피어있었다.
ⓒ 김민수
그리고 바다의 곁에는 지난 가을부터 꽃망울을 내기 시작한 갯쑥부쟁이라는 꽃이 있었다. 바람에 시달릴 대로 시달리면서 피어났기에 꽃을 피운 가을부터는 "이까짓 바람쯤이야!"할 정도로 단련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너른 바다를 바라보려면 이 정도의 칼바람이야, 간혹 태풍에 넘어오는 파도쯤이야 넉넉하게 감당하는 것이 통과제의라고 생각했다. 그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있으면서도 가장 넓은 바다, 그 바다에게 지난 가을부터 편지를 쓰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종달리두문포구- 어느 날 바다에 눈이 내리고, 포구에 정박한 배들 조차 눈을 이고 있는데.
ⓒ 김민수
포구는 아늑한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이다. 포구를 지나 너른 바다로 나가는 배는 마치 애인을 만나러 가는 젊은이들의 걸음걸이고,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를 피해 포구로 돌아오는 배는 깜짝 놀라 어머니 품에 안기는 아기의 걸음걸이다.

어쩌면 포구는 바다와 꽃의 편지를 이어주는 우체부 역할을 자처하고 싶었을 것이다. 육지를 오가는 이들의 발자욱에 묻은 육지의 향기, 꽃의 향기를 바다에게 전하기도 하고, 까치발을 들어서 볼 수는 없는 먼바다의 소리를 꽃에게 전하기도 했을지도 모르겠다.

▲ 갯쑥뱅이도 함박눈에 고개만 빼꼼하게 내밀고 바다를 본다.
ⓒ 김민수
그렇게 바다에 눈이 내리던 날, 해안가에 피어 있던 갯쑥부쟁이는 간신히 고개를 내밀고 바다를 바라볼 수 있었다. '난생 처음이야! 너무 추울 줄 알았는데 이젠 따스해'라고 그가 말하는 듯하다.

사실, 함박눈 내리는 날은 여느 겨울날보다는 따스하다. 그래서 눈오는 날은 거지들이 빨래하는 날이라는 말이 있는가 보다.

▲ 앙상한 가지들만으로 겨울을 나는 것들, 흙으로 돌아갈 것들과 바다로 돌아갈 것들 제 순서대로 간다.
ⓒ 김민수

피었다가 지는 것들, 이내 눈처럼 쌓였다가 녹아지는 것들은 흙으로 돌아가고, 또 바다로 돌아간다. 꽃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꽃이 되는 것은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니다. 본래부터 그렇게 그들은 하나로 살아왔다. 하나이면서도 그리워하는 삶을 살아오면서 서로를 그 안에 담고는 그 언젠가는 서로를 닮은 모습으로 피어난다.

바다가 꽃에게 묻는다.
"겨울 바다가 춥지 않니?"
꽃이 바다에게 대답한다.
"네가 추운 만큼만 춥단다."
바다가 다시 꽃에게 묻는다.
"너는 왜 한 겨울에도 피어 있니?"
꽃이 다시 바다에게 대답한다.
"네가 되기 위해서야. 나도 이제 곧 떠날 거야. 흙으로 돌아가겠지. 그러나 머지않아 세상의 가장 낮은 곳 바다에 이를 거야."
이제 꽃이 바다에게 묻는다.
"너 혹시 그 길을 아니? 바다로 가는 길."
바다가 꽃에게 다시 묻는다.
"너는 아니?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날 수 있는 길."


- 자작시 <바다가 꽃에게, 꽃이 바다에게>


▲ 눈 속에 피어난 갯쑥부쟁이는 그 빛깔이 더 선명하다.
ⓒ 김민수
꽃 안에, 바다 안에 서로를 담고 있다. 서로가 들어 있다. 서로를 보듬어 안고 살면서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 때론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 궁극에는 하나가 됨이다.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서 꽃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봄이 오면 다시 기지개를 피고 피어날 것이다. 그 피어나는 꽃에는 온 우주가 들어 있다.

▲ 물빠진 바다, 물길이 남아 바다에 길을 만든다.
ⓒ 김민수
바다에도 길이 있다. 더 낮은 곳이 있고, 물길이 있다. 가장 낮은 곳부터 채워짐으로 바다는 평등하다. 높은 곳부터 채워지는 곳은 평등하지 못하다. 바다가 온 생명이 젖줄이 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가장 낮은 곳부터 채우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갯쑥부쟁이를 피웠던 줄기들도 하늘로 길을 만든다.
ⓒ 김민수
꽃도 길을 간직하고 있다. 그 길 끝은 두 갈래이다. 하나는 꽃으로 하나는 보이지 않는 뿌리로 이어져 있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꽃을 피워내고야 마는 뿌리의 마음, 그 마음이 곧아서 똑 같은 흙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지라도 자기에게 필요한 물감만 뽑아 수채화를 그리듯 자기만의 꽃을 피운다. 길, 보이는 길과 보이지 않는 길이 있다.

▲ 눈이 그치고 다시 밀물이 밀려오면 저 길도, 하얀 눈도 바다가 되겠지.
ⓒ 김민수
바다와 꽃, 그들은 행복하다. 서로가 존재하기에 행복하다. 사실, 우리네 사람들도 그런 존재들이다. 서로 통하는 길, 그 길을 잃고 살아가기에 서로에게 아픔을 주는 것이다.

겨울이 깊어간다.
내가 걸어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인지 묻고 대답할 수 있는 도반을 만나는 따스한 겨울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