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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風景

눈이 먼저 내린다-이신조꽁트

by 진 란 2007. 1. 8.

[신년콩트]

눈이 먼저 내린다

소설가 이신조

◆이신조

1974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

장편 <기대어 앉은 오후> <가상도시백서>, 소설집 <나의 검정그물 스타킹>, <새로운 천사>

“밀운불우(密雲不雨)…”

 

한숨처럼, 작게 내뱉은 중얼거림. 분명 남편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말은 무심코 내 입에서 흘러나온 게 아니었을까. 우리는 동시에 같은 말을 중얼거릴 뻔한 것이다.

볼륨을 낮춘 TV 심야뉴스는 2006년의 한자성어로 ‘밀운불우’가 선정됐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구름이 빽빽하게 끼었으나 비가 내리지 않는다. 밀운불우란 웬만큼 여건이 조성되었음에도 상황의 진척이 없거나, 좀처럼 일이 성사되지 않아 답답함을 느낄 때 사용되는 한자성어라는 앵커의 설명이 이어졌다. 은섭이는 옆방에서 잠들어 있었다. 깁스를 감은 아이의 오른팔은 어떤 자세를 취해도 불편하게만 보였다. 밀운불우는 뉴스에서처럼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상징적인 표현이기도 했지만, 최근 남편과 나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도 더없이 적절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미운 네 살이란 말이 있다잖아.”

 

“미운 일곱 살이 아니고?”

 

“요즘은 미운 네 살이래.”

 

“그럼 일곱 살은?”

 

“죽이고 싶은 일곱 살.”

 

“뭐? 설마……”

 

인터넷 육아사이트를 훑어보며 남편과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을 때만 해도 우리의 목소리는 조금도 심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우리를 ‘딩크족(族)’이라고 불렀다. 딩크(Double Income No Kids), 아이 없이 삶을 즐기며 사는 젊은 부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구시대적 표현보다는 한결 배려와 세련됨이 느껴지는 말이다. 그러나 반드시 아이가 없어야만 삶을 즐길 수 있다거나, 무슨 일이 있어도 삶을 즐기기 위해 아이를 갖지 않는다는 식의 어폐가 포함되어 있어 제대로 이해되기 어려운 용어임은 분명했다.

 

“공개적인 국내입양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 여간 다행이 아닙니다. 이보다 더한 사랑의 실천은 없죠.”

 

입양기관의 담당자가 한 말은 물론 상투적인 인사치레 같은 것이었지만, 우리는 묘한 반발심 같은 것을 느꼈다. 결혼 6년차가 된 남편과 나는 삼십대 후반에 접어들었다. 불임판정을 받은 것은 2년 전의 일이었다. 의사는 기적적인 사례들을 소개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노력해보자고 말했지만, 우리는 그 말에도 딱히 설명할 수 없는 거부감을 느꼈다. 남편과 나는 다른 많은 부부들처럼 여러 면에서 의견과 취향의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간절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란 점에서만은 확실한 일심동체였다. 우리가 간절히 아이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이가 없는 삶을 간절히 원한 것도 아니었다. ‘간절하다’는 말은 ‘딩크’만큼이나 왜곡의 소지가 많은 단어였다.

 

“서너 살쯤 된 남자아이가 어떨까?”

 

남편이 말했다. 나 역시 생각이 바뀌어 있었다. 우리는 애초 계획과는 달리 갓난 여자아이 대신 두 살 때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힌 팔찌가 채워진 채 보육원 앞에 버려져 있었다는 은섭이란 네 살짜리 남자아이를 입양했다.

 

“안녕, 우리 한번 잘 해보자.”

 

남편이 은섭이에게 한 첫 말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거창하고 위대한 사랑의 실천을 위해 아이를 입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은섭이를 안아 올렸다. 아이의 정수리가 코 끝에 닿았다. 천천히 식고 있는 부드러운 푸딩 냄새 같은 게 났다.

모든 것이 수월하리라 생각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겪게 될 이런저런 어려움이 최소 자연스러울 거라는 바람은 있었다. 그 과정에서 뜻밖에 자잘한 기쁨도 맛보게 되리라 기대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예의 어려움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은섭이는 한밤중에 몇 번이나 깨어나 잠투정을 했다. 어김없이 그 자리에서 소변을 지리거나 발작 같이 자지러지는 울음을 터뜨렸다. 단순한 칭얼거림이라고 하기엔 도가 지나쳤다. 젖먹이들처럼 배고픔이 그 이유인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당혹감을 감추며 최선을 다해 아이를 어르고 달랬다. 그러나 속수무책이었다. 은섭이는 단 하룻밤도 온전히 잠들지 못했다. 한 달이 넘도록, 두 달이 넘도록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보육원에서는 없었던 일이라고 했다. 늘 잠을 설치는 탓에 낮이면 아이는 몽롱한 표정으로 늘어져 있기 일쑤였다. 우리 역시 피로와 짜증이 쌓여갔다.

은섭이는 유난히 말수가 적었다. 감정 표현 역시 분명하지 않았다. 또래들에 비해 좀 늦된 탓이려니 생각했지만, 꼬박 이틀이나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때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남편과 나는 입양기관에 상담전화를 걸고 인터넷 육아정보를 검색했다. 아직 바뀐 환경에 적응이 안 된 탓이다, 일시적인 스트레스 때문인 듯하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같은 답변들만이 되풀이되었다.

 

“어쩌면 매일 지독하게 나쁜 꿈을 꾸는 건지도 몰라.”

 

불면증에 걸린 남편이 체념조로 말했다. 한 아이를 책임진다는 것. 그것은 그 아이의 악몽까지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걸까. 나는 두려워졌다. 처음 계획대로 갓난아이를 입양하는 편이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다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의 이기심과 옹졸함이 더없이 부끄러웠으면서도, 한사코 우리의 애정과 노력을 거부하는 은섭이에게 걷잡을 수 없는 원망과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다.

무엇 하나 제대로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일상이 석 달째 계속되고 있었다. 은섭이는 미운 네 살다운 극성스런 말썽은 일으키지 않았다. 대신 병적인 잠투정과 일관된 침묵과 무감동으로 남편과 나를 흠씬 두들겨 맞은 복서처럼 지치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결국 인내심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 것은 나들이를 나섰던 놀이공원에서였다. 아이는 계단에서 굴렀다. 주변 사람에게 부탁해 막 셋이 함께 사진을 찍은 직후였다. 금이 간 손목뼈 부근에 압박붕대를 감고 깁스를 하는 동안 은섭이는 울지 않았다. 자칫 잘못했으면 심각한 골절이 될 뻔했다는 의사의 말에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부득이 한 경우 파양(罷養)을 선택하실 수도 있습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상담원과의 전화를 끊었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파양. 입양의 반대말은 딩크가 아니라 파양이다. 파양이란 말이 마치 죄인의 낙인처럼 몸 어딘가 아프게 찍혀버린 듯했다.

어두운 방, 깁스한 오른팔을 가슴께에 올려놓고 은섭이는 얕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밀운불우. ‘불우(不雨)’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우는 왠지 ‘불우(不遇)하다’는 말 같다. 아이는 불우하다. 남편과 나는 불우하다. 우리는 불우하고 불행하다. 눈물이 쏟아졌다.

새해를 며칠 앞둔 저녁 눈이 오기 시작했다. 폭설주의보가 내려졌으며 퇴근길이 대혼잡을 이루고 있다는 뉴스가 TV에서 흘러나왔다. 남편은 꼼짝없이 도로에 갇혀버리고 말았다는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렸을 때 창 밖의 함박눈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은섭이가 보였다.

두툼하게 옷을 입혀 아이를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눈은 벌써 발등이 덮일 정도로 쌓여 있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옥상 위의 눈밭을 주홍빛 가로등이 비춰주고 있었다. 그 위로 은섭이의 작은 발자국이 어지럽게, 그러나 무구하게 찍히기 시작했다. 죄 없이, 소리 없이,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내 곁으로 돌아온 아이가 불쑥 깁스를 감지 않은 왼손을 내밀었다. 작은 눈뭉치가 녹아 흩어지고 있었다.

 

“눈사람!”

 

은섭이가 소리치듯 말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눈사람!”하고 말했다. 나는 무릎을 굽히고 아이의 시린 왼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 작은 것을 내 더운 뺨에 가져다 댔다. 다친 오른손도 먼저 그렇게 해줬어야 했던 건지 모른다. 아이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다시 “눈사람”하고 말했다.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급히 쌓인 눈을 쓸어 모았다. 눈사람. 잘 뭉쳐지지 않았다. 눈사람. 나는 눈사람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린 곧바로는 눈이 잘 뭉쳐지지 않아. 좀 있다 아빠 오실 거야. 금방 오실 거야. 그러면 같이, 엄마랑 아빠랑 은섭이랑 같이, 아주 큰 눈사람 만들자.”

 

체증이 씻기듯 시원하게 비가 퍼부은 것은 아니었다. 어두운 하늘 구름이 몰려들었고 비 대신, 비 보다 먼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괜찮다, 괜찮다’ 하며 내리는 거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괜찮다, 괜찮다, 잘 뭉쳐지지 않는 눈을 연신 손아귀에 그러쥐며 나는 몹시 간절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