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風景

연산홍 피었다고

진 란 2009. 4. 22. 06:37

선암사의 봄 
이형권
저리도 꽃이 붉은데 
남명스님의 글씨는 
여직 취해 있다. 
가신 지 몇 해나 되었을까 
칠전선원 빈 선방에 앉아 
단청같이 붉은 눈빛 
낮달이 흐르던 산중 
운필이 꼭 취객처럼 
서글펐다. 
이름난 고관대작에서 
유곽의 여인에 이르기까지 
벽안당 처소에는 
육두문자처럼 쏟아지던 괴각 
거칠 것이 없었다. 
영산홍이 피던 날 
젊은 날의 순정이 그리웠던가 
六朝古寺 편액 아래 
무현금의 춤을 추고 
무우전 뒷방에 몸져누워 
녹슨 철불에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때가 이르러 
조계산에 우렁우렁한 
범종소리 하나 남기고 
자취가 없어졌느니 
달마전 섬돌아래 
영산홍이 피고 지도록 
선암사에는 
다시 못 올 봄이 있었다. 

조계산의 신록과 영산홍 피는 선암사의 봄 

봄날 선암사에 가면
無憂殿 툇마루에 앉아 
그대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어요.
곡차 한 잔을 마시고 글씨 한 폭을 쓰고
곡차 한 잔을 마시고 육두문자 내지르고
영산홍 꽃빛에 첫사랑이 그리워
꺼이꺼이 울었다는 어느 老長의 순정
벌써 아득한 세월 저편의 이야기
사하촌의 주점에 걸린 글씨 한 폭
마구 휘갈겨 쓴 유서처럼 서글퍼지는 이야기지요
풍문에 들으니 그 老長 젊은 의사였을 때
사랑했던 여인이 떠나버리자 나이 먹은 풋중이 되어
떠돌이 객승처럼 정처가 없었는데
영산홍 피는 봄이 좋아 10여년을 선암사에 들었다고 합니다.
일로향실과 벽안당의 오롯한 주인이 되었을 때
곡차와 묵향에 젖어 속세와 경계가 없었는데
꽃피는 날 마지막 인사는
영산홍이 보기 좋습니다. 꽃구경하고 가세요, 였답니다.
대웅전 후원에서 불조전 원통전 달마전 무우전을 돌아
창파당 해천당 설선당 마당에 이르기까지
아홉 그루의 영산홍이 황홀하게 피어오르는
선암사의 봄날    
그 老長 옛 사랑이 그리워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하였다는데
생각해보면 그렇지요 인생이란 게 
꽃이 피었다고 꺼이꺼이 울고 
꽃이 피었다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그렇지요 인생이란 게 뭐 이런 낭만도 있어야 인생이지요.
봄날 선암사에 가면
無憂殿 툇마루에 앉아 
그대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어요.
연두빛으로 일어서는 조계산의 산빛처럼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들려줄 그런 사랑 이야기가 있어요.


순천 조계산 선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