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구두
[빨간 구두] 신의 형벌과 인간의 욕망 사이
불행한 순간을 마주한 사람들은 자신의 지난 행동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데도 신의 섭리를 어긴 것에 대한 형벌에서 자기 죄의 이유를 찾으려 한다. 이에 대해 영화 [빨간 구두]는 그것은 신이 내린 벌이 아니었다고 반문한다. 안데르센 동화에서 "빨간 구두를 신는 것이 왜 신성한 교회와 하느님을 모독하는 짓인가요?"라고 당돌하게 묻던 소녀처럼 "우리 사랑이 왜 벌을 받아야 하나요?"라고 말이다. 발목을 자르기 전엔 멈춰지지 않는 빨간 구두의 춤처럼 서로를 파괴하고 참혹한 죽음에 이르게 하더라도 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욕망이고 사랑임을 신도 잘 알기에 [빨간 구두] 속 남녀의 불륜은 더욱 애절하다. 이렇듯 온전히 수긍할 수 없는 성서적 계율과 인간 욕망의 고찰은 [빨간 구두] 속으로 들어가는 주요한 관문이다.
성공한 외과의사이자 매력적인 아내(클라우디아 게리니)와 부를 가진 주인공 띠모떼오(세르지오 카스텔리토). 딸 안젤라가 교통사고로 그의 병원에 실려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는 동안 띠모떼오는 15년 전의 기억으로 돌아가 자신을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한 여인 이딸리아(페넬로페 크루즈)를 떠올린다. 딸이 태어나기 전 그는 너무 완벽해서 버거운 삶과 결혼생활에 싫증을 느끼던 차 우연히 들른 시골에서 보기에도 허름한 여인 이딸리아와 지독하고도 위험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불륜이라는 이름 앞에 둘의 사랑은 허락되지 못하고 비극을 맞는다.
영화는 하늘에서 비와 함께 내려오던 카메라가 한 프레임 안에 빨간 오토바이 헬멧, 앰뷸런스가 나뒹구는 십자로를 가득 잡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강렬하고 전지전능한 시선은 과연 누구의 것일까. 감독은 띠모떼오의 딸을 구하러 온 구원의 손길이자 천사의 환영, 신의 섭리라고 말한다. 이처럼 [빨간 구두]에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십자가, 성모 마리아 형상 등 성서적 모티브와 더불어 허영심과 쾌락을 탐하면 벌을 받는다는 그리스도적 사상이 우선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주인공들의 행동이나 의식을 통해 신의 섭리와 대척하는 드라마를 펼쳐 보이며 나아가 성서적 결과를 거스르고 있어 흥미롭다.
띠모떼오가 무더위에 마신 보드카를 핑계 삼아 이딸리아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전화기 저편에서 대답하는 아내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침대 맡 비뚤어진 십자가를 바로 세운다. 그리고 폭력이 아닌 진짜 사랑이라고 신에게 대꾸하듯 이딸리아를 강간한다. 오직 사랑을 위해 띠모떼오가 이딸리아를 태우고 그녀의 고향으로 도피했을 때에도 신조차 그들을 막을 수 없다는 듯 멀리 언덕 위엔 나무 십자가는 허망하게 서있고, 수술대에 누운 이딸리아의 끌러진 십자가 목걸이는 초라하게만 비춰진다.
자신의 아이를 낙태하고 만신창이가 된 이딸리아 앞에서 차마 아내가 임신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던 띠모떼오가 "날 용서하지 못하겠지?"라고 묻자 이딸리아는 "신께서 우릴 용서 못하겠죠"라고 답한다. 다시 띠모떼오가 "신은 없어"라고 말하지만 이딸리아는 "그럼 믿어봐요, 계시다는 걸"이라고 마무리 짓는다. 그녀는 혹은 신은 띠모떼오를 혹은 그들의 사랑을 용서할까? 신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 띠모떼오가 처음으로 신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 있었다. 값싼 임신중절로 몸이 망가진 이딸리아를 살릴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는 그녀를 살려주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나무와 개와 강도 죽을 것이라며 신을 협박한다.
그의 운명 이딸리아와 맞바꾼 딸 안젤라는 이제 그를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딸의 수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창 밖을 내다본 띠모떼오는 신이 아니라 병원의 십자통로 한가운데 흰 의자를 끌고나와 앉은 빨간 구두를 신은 여자의 뒷모습에 대고 자신이 잔인했노라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엾은 한 여인를 탐했노라고 용서를 빈다. 그리고 딸의 목숨을 지켜준 저 천사가 바로 이딸리아의 환영이고 그녀의 가호가 그 역시 보호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거울에 비친 이딸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띠모떼오는 집착처럼 품고 있던 이딸리아의 빨간 구두 한짝을 그 자리에 놓아둔다.
빨간 구두는 욕망을 상징한다. "원래 제 인생이 그래요. 늘 뭔가가 옭아매고 있어요"라고 체념하는 이딸리아의 얼굴은 빨간 구두를 포기 못하는 광기어린 소녀의 얼굴과 맞닿아있다. 가난하고 천한 신분의 그들은 욕망의 대가로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어릴 적 빨간 드레스를 갖는 대신 친아버지의 성폭행을 감내해야 했던 이딸리아는 허영심과 쾌락을 탐한 대가가 얼마나 큰지 익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띠모떼오가 사준 빨간 구두에 온몸을 내맡긴다. 딸을 안은 모습이 성모 마리아 상을 닮은 아내와, 아이를 떼낸 후 빨간 구두를 신고 아무렇게나 춤을 춰대는 이딸리아가 성녀와 창녀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있다. 하지만 띠모떼오와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는 그들의 모습이 별다르지 않듯 두 여자의 내면에 자리한 욕정의 차이는 백짓장 하나에 비유될 만큼 얄팍하다. 결국 이딸리아는 구두 한짝이 벗겨진 채로 쓸쓸히 묻히지만 띠모떼오를 용서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하고, 딸의 회복을 통해 띠모떼오의 죄의식 역시 사랑으로 치유한다. 여기에서 영화는 동화와 달리 금욕주의에서 비롯돼 욕망으로 빚어진 죄는 반드시 혹독하게 징벌해야 한다는 기독교적 색채에만 머물지 않는 것이다.
소녀가, 혹은 띠모떼오나 이딸리아가 원했듯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빨간 구두를 꿈꾼다. 하지만 영화는 애초에 빨간 구두를 탐했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 안에서 자연히 잉태될 수밖에 없는 원죄를 자책하고 후회하는 동안 바로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스스로에게 용서를 구하라, 그러면 구원받으리라.
남경아 기자(springsalmon@hanmail.net)
영화와 네티즌의 만남 "시네티즌(www.cinetizen.com)"
<빨간 구두>-처절한 사랑의 행로
CAST 띠모떼오·세르지오 카스텔리토 | 이딸리아·페넬로페 크루즈 | 엘자·클라우디아 게리니
DETAIL 러닝타임·122분 | 관람등급·18세 관람가
HOMEPAGE www.dontmove.co.kr
한 소녀가 교통사고를 당해 쓰러져 있다. 그녀는 아버지 띠모떼오가 의사로 있는 병원으로 이송되고, 띠모떼오는 차마 딸 안젤라의 수술실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던 중 그는 창문을 통해 예전에 사랑했던 이딸리아처럼 보이는 한 여인의 뒷모습을 본다. 너무 놀란 그의 머릿속에는 안젤라가 태어나기도 전 있었던 자신과 이딸리아의 사랑에 대한 기억들이 마구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미 그는 인정받는 외과의사였고, 아름답고 활발한 성격의 부인, 엘자도 있다. 누가 봐도 행복해야 할 그는 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가난하고 초라해 보이는 이딸리아를 한 시골마을에서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이 영화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빨간 구두>라는 작품을 접했을 때 딱 드는 생각은? 이제 스타가 된 페넬로페 크루즈라는 이름을 이용한 그저 그런 예전 영화? 노골적이고 조금은 지루한, 익숙하지 않은 유럽영화? 이렇게 생각한다면, 영화가 시작된 후 계속 재미를 느끼고 있는 자신에 대해 놀랄지도 모르겠다. 2004년 작품인 <빨간 구두>는 2002년 유럽 전역에서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된 이탈리아 여성작가 마가렛 마잔티니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감독은 그녀의 남편인 세르지오 카스텔리토. 감독과 배우를 함께 하고 있던 그는 직접 남자 주인공 띠모떼오 역을 맡았다. 그리고 페넬로페 크루즈는 ‘도대체 이 사람이 그녀인가’ 싶을 정도로 보잘것없는 시골 여인으로 나와 열연을 펼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를 안정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영화의 구성과 띠모떼오의 여러 가지 과거를 훔쳐보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안젤라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그녀의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띠모떼오의 회상으로 영화는 진행된다. 갑작스레 과거의 다양한 기억이 떠오르는 듯 그 회상들은 단편소설처럼 등장한다. 우연히 만난 이딸리아를 그저 창녀쯤으로 여기던 때,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을 때, 불우했던 유년 시절, 부인으로부터 첫 아기를 임신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안젤라와 감정적으로 부딪힌 시간…. 초조한 띠모떼오의 머릿속을 부유하는 기억들은 하나같이 지루하지 않게 펼쳐진다. 그 사이, 모든 걸 갖추고도 불행할 수밖에 없었던 띠모떼오도, 일생에 상쾌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슬픈 운명의 이딸리아도, 끝까지 완벽하게 행복하고 싶은 엘자도, 태어났을 때 아버지로부터 기쁨과 사랑을 받지 못한 안젤라도 어느덧 정이 들어버린다. <빨간 구두>의 구성은 등장인물 중 누구 한 명도 소홀히 볼 수 없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안젤라의 수술은 성공할까? 띠모떼오가 본 사람은 이딸리아일까?
‘그대로 있어 달라’는 원제와 국내 제목은 너무 다르다. 이딸리아가 띠모떼오로부터 선물로 받는 그 빨간 구두. 보통 ‘욕망’으로 대변되는 빨간 구두가 이 영화 속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두 사람을 이어주는 끈이다. 그것은 욕망이라기보다는 사랑의 표현이자, 그리움이며 사랑에 대한 기억이다. 원제보다 은유적이면서 강렬한 이미지를 담은 <빨간 구두>라는 제목을 붙인 건 굉장히 좋은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