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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1919년 7월호/북한의옛모습

진 란 2008. 9. 7. 14:51

[韓國 역사]

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1919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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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 역사]

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1919년 7월호에 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1919년 7월호에

Roy C. Andrews 신부가 함경북도, 두만강 , 압록강 그리고 백두산을 다녀보고 사진과 글을 올렸읍니다.

"숨어있는 왕국에서 알려지지 안은 외지를 탐사" 라고 하는 제하에 특집을 소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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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사람들과 똑 같은 의복을 입은 북쪽 조선사람들.

 

조선에서도 북쪽 끝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조상대대로 산 언덕에 있는 커다란 바위나 나무를 무속신으로 섬기며 살아 갑니다.

여자들은 반 노예같은 대우를 받으며 일생을 보냅니다.

태어난 지역을 벗어 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살아 갑니다.

이지역 사람들은 백인을 접견 한다는건 내가 처음인것 같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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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사건으로 1882년 한미 교역이 이루워진 이후 15년이 지난 1897년까지도 극히 적은 수의 미국인들 만이 조선을 다녀 갔을 뿐입니다.

1904년 일-로 전쟁 이후 철로가 개통 됨으로서 조선은 개방 속도가 빨라 지기 시작했읍니다.

그러나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의 오지는 미지의 세계 그대로 입니다.

믿기지 안는 ?지가 전개 되는 가 하면 빽빽한 나무숲이 펼처지고 깊숙한 계곡이 있는가 하면 광활한 대지가 자연 그대로 있읍니다.

깊은 산을 오르며 예쁘게 반짝이는 경석을 찾았는가 하면 유령이 나올것 같은 백두산(작가가 Long White Mountain=장백산 이라고 표현)

정상에 올라 밑을 내려다 보면 천지가 있느데 "용왕의 못"이라고 한다는 군요.

 

1907년 백인으로서 예수회 카토릭 신부 두분이 만주를 통해 북쪽에서 백두산에 오른 일이 있읍니다.

그러나 남쪽에서 백두산 천지에 올라간 백인은 내가 처음입니다.

나를 안내하고 있는 키작은 김씨에게 물어 보았읍니다.

"기독교인 이라고 했지요, 예수를 믿나요 ?

"가끔씩 기독교 인입니다. 지금은 바빠서 안 믿지만 앞으로 시간이 나면 믿을 겁니다."

김씨나 다른 조선인들의 서구종교에 대한 시각이 매우 걱정스럽게 느껴집니다.

 

김씨에게 다른 질문을 했읍니다.

"조선인들이 일본인이나 식민지정책을 좋아 하나요?"

김씨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하더군요.

일본인 앞에서는 어쩔수 없어서 웃고 있지만 마음속 깊은곳에서는 증오가 끌어 오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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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에 도착해서 제일 흥미로운 것은 작은 선로위를 달리는 궤도차 였읍니다.

명태를 싫어 나르기 위해서 놓은 철로입니다.

북쪽 조선인들은 명태를 많이 먹습니다. 명태요리가 발달되어 있고

심지어 김치에도 명태를 넣고 발효시킵니다.

궤도차에 짐을 싣고 부령까지 갔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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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 있는 집들은 벽과 바닦을 진흙으로 만듭니다.

지붕은 볏짚으로 얹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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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령에서는 조선인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는데 정말 잊을수 없는 체험이었읍니다.

밤새도록 빈대, 이, 벼룩등 별의 별 벌레들이 괴롭혀서 잠을 잘수가 없었읍니다.

신기한 것은 온돌이라고 하는 난방 씨스템이었읍니다.(설명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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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이나 걸려서 무산에 닿았읍니다.

고풍스러운 도시에 오백년동안 버텨온 요지부동의 성이 ?눈에 들어 왔읍니다.

반은 허물어진 유적에 매료 되었고 거의 다 지워진 비문이며 이끼낀 기념비들이 매우 매혹적 이었읍니다.

무산은 백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옛날 도시입니다.

관가가 반은 온전한 대로 반은 허물어 진 대로 있었읍니다.

성문과 망루 그리고 남아있는 성들은 옛날 번성했던 시절을 말해주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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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과거시험을 치루기 위해서 모여든 유생들이 묵었던 일종의 기숙사입니다.

시험기간 동안에는 이곳에 기거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들어가던 그날 무산시내 사람들은 매우 들떠 있었읍니다.

겨우 12마일 떨어진 산속 호산도라고 하는 마을에 호랑이 두마리가 나타났다고 법석들 이었읍니다.

조선북방 호랑이는 인디아나 말레이지아산 보다 월등 아름답고 화려한 동물입니다.

추운 산속에 살고 있고 시베리아까지 분포되어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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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중간에 오두막집이 호랑이 사냥 동안 묵었던 집입니다.

 

사냥꾼 박씨를 따라 나섰읍니다.

박씨가 호산도 마을에서 제일 먼저 엽총을 쏘아 잡은 동물은 사슴이었읍니다.

총알은 사슴의 심장을 관통했읍니다. 박씨는 사슴에게로 달려가 칼로 사슴의 배를 갈라

심장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피를 입을 대고 마셨읍니다.

그다음에는 아직 온기가 있는 사슴의 간을 칼로 베어 재빨리 입에 넣었읍니다.

나로서는 끔찍하고도 놀라웠읍니다.

그러나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조선인들은 사슴이나 아무 야생동물의 피를 더울때 생으로

마시면 굉장히 정력이 강해 진다고 믿고 있었읍니다.

그외에도 호랑이의 발톱, 수염, 뼈, 잇빨등을 준비 해 두었다가 전쟁에 나가는 군인이나

위험한 곳에 출정하는 사람에게 주면 용기가 충천한다고 믿고 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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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도에 있는 호랑이 사냥꾼의 집 (사냥 해온 동물의 가죽을 말리고 있읍니다)

 

무산으로 돌아와 다음여행지 인적없는 황야로 떠날 준비를 하는데 마구꾼들이 아무도 선뜻 나서지를 안는 겁니다.

알고 보았더니 국경 근처 황야에는 중국인 산적들이 있다고 합니다.

호랑이 뼈라도 있었으면 일꾼들에게 주겠는데 그것도 구할 수가 없었읍니다.

열심히 교섭한 끝에 경찰관들을 앞에 내세우고 말 여섯마리에 마부들 그리고 조리사,

통역인, 포수로 짜여진 당당한 구룹이 형성되었읍니다.

그래도 인부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있었읍니다.

두만강을 따라 가다가 산 비탈로 올라갔읍니다.

경치가 매우 좋았읍니다. 저 밑에는 모밀과 조밭이 있고 그곳에 아주 작은 마을에 오두막집이 있었읍니다.

사람들은 조선인 옷인 흰옷을 입고  양지쪽에 앉아 긴 담뱃대를 물고 있었읍니다.

 

논사동이라고 하는 마을에는 다 쓸어저 가는 오두막집이 12채 있었읍니다.

마을 사람들이 처음에는 나에게 접근을 꺼리다가 차츰차츰 가까이 오기 시작했읍니다.

그들은 나의 푸른눈을 제일 신기하게 보고 있었읍니다.

그들은 내가 제대로 볼수 있는지 궁굼해 하고 있었읍니다.

100미터쯤 떨어저 있는 나무나 바위를 가리키며 무었인가 물어보기도 했읍니다.

시험을 해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읍니다.

시력검사를 계속하고 있는동안 300미터쯤 떨어진 언덕에 개가 서 있었읍니다.

그들은 저 개를 총을 쏘아 맞힐수 있겠는가 물어 왔읍니다.

나는 총을 들어 개를 쏘았고 개는 그자리에서 죽었읍니다.

그날저녁 마을 사람들은 개고기 파티를 벌렸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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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사동 언덕 길옆에 있는 작은 무속신당.

10-14세기에 번창햇던 불교는 새왕조 300년동안 쇠퇴해 갔읍니다.

중들은 무지와 부도덕에 빠저 경멸을 받았고 유교사상을 숭배하다보니 조상차례가 일반화 되었읍니다.

악귀의 신앙이 확산 되었고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악령을 달래느라고 많은 물질을 낭비합니다.

 

 

진달래꽃으로 덮혀있는 언덕이 조선을 상징하는것 같읍니다.

마치 중국이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름 중화(꽃속의 나라)를 빌려온것 처럼.

아름다운 진달래꽃은 압록강 언덕에 무진장으로 피어 있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