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 문화제
2010년 10월 15일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송강마을 특설무대에서
고양시 향토문화 보존회 주최로
송강문화제 위원회가 주관하는 <송강정철 문화제>가 열렸다.
지역 해병대 자원봉사자들이 차량 안내를 해주고
특설 무대 뒤에서는 아주머니들이 빈대떡을 부쳐내고 시루떡에 막걸리와 김치 두부 안주까지 마련해 놓고
참석자들에게 향연을 베풀어 주었다. 조명감독을 비롯한 몇몇의 진행자들을 빼고는 비교적 연령대가 높은
지역유지들과 참석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날씨가 예전에 비해 쌀랑한 데다 야외행사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겨울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신원동 송강마을에는 송강선생의 부모님과 연인 江娥의 무덤이 있었다.
서울에서 태어난 선생이 이곳저곳(창평, 고양, 강계, 강화 등지--)으로 주거지를 옮긴 이유는, 권력의 가운데서 걸핏하면 시기와 음모에 휘말려 낙향하거나 유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부귀영화를 누리며 뭇 여인을 사랑하면서도 때로는 남원의 童妓 紫美(후에 ‘江娥’로 불림)의 순결을 지켜주기도 한, 多情多感한 분이었다.
한편 한문이 지배하던 당시에 선생은 우리의 한글로 수많은 시조와 가사들을 씀으로써 우리말 사랑을 앞장서
실천했다. 국문학사에서 선생을 높이 평가하고 기리는 이유가 바로 그 점이다.
하루도 열 두 때 한 달도 설흔 날
져근덧 생각마라 이 시름 닛쟈하니
마음의 매쳐이셔 골수의 깨텨시니
편작이 열히오나 이 병을 엇디하리
어와 내병이야 이님의 타시로다
찰하리 싀어디여 범나븨 되오리라
곳나모 가지마다 간데 죡죡 안니다가
향므든 날애로 님의 오새 올므리라
님이야 날인 줄 모르셔도 내 님 조차려 하노라
-<사미인곡> 結詞 부분-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설흔 날
잠시라도 생각 말고 이 시름 잊고자 하나
마음에 맺히고 뼈에 사무쳤으니
편작이 열이 있어도 이 병을 어찌 고치겠는가
차라리 죽어서 호랑나비나 되야겠다
꽃나무 가지마다 가는 데마다 앉았다가
향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임이 난 줄 모르셔도 나는 님을 따르리라)
***신원리 관련 시조**
새원 원쥬ㅣ되여 되롱삿갓 메오이고
셰우샤풍의 일간듁 빗기드러
홍뇨화 백빈쥬뎌의 오명가명 하노라
(신원리 院主되어 비옷 입고 삿갓 쓰고
가랑비 비낀 바람에 낚싯대 비스듬히 들고
붉은 여뀌 흰 마름꽃 피어있는 물가에 왔다갔다 하겠노라)
새원 원쥬ㅣ되여 싀비를 고텨닷고
뉴슈 청산을 벗사마 더뎟노라
아해야 벽뎨예 손이라커든 날나가다 하고려
(신원리 院主되어 사립문 다시 닫고
흐르는 물, 푸른 산을 벗 삼아 던졌노라
아이야 벽제의 손님이라 하거든 나는 나갔다고 해라)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송강마을>
남원기생 자미-후에 '강아'라고 불렀다
이 고장 사람인 송강문학관장 이은만 선생이 사재를 털어 지은 집
우리 <화사모> 지휘자 요새 여기저기 열심히 참석합니다
가사 <관동별곡> 서두~
사회자 윤고영 시인
김성환 송강문화제 위원회 회장-취임 후 두 달만에 치르는 행사라고~
우리 친구들
창작 판소리 개막 선포(김형철 국립 창극단)
정철의 대표작 <사미인곡> 낭독
박현채 교수님, 정철의 훈민가(시조) 낭송
별난 찍사
탤런트 백인철씨가 심청가 중 <황성천리>를 부른다
송예슬의 살풀이춤
임정미 강세영 김소현의 가야금병창 방아타령
옆자리에서 식사를 마친 신월숙 유병문 서현숙님이 우리와 합석, 민요가락을 들려줬다
화답이 없을소냐, 우리 중에 한 사람이 답가를 불렀다
회장님, 오늘 참으로 수고 많았습니다!!!
‘영어만이 살길이다.’ 외쳐대는 이 시대에, 조선의 한 정치가이자 文人이었던 분을
기리는 축제에 젊은이들의 자발적 참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앞으로는 좀더 널리 알려서 지역의 중 고등학교 학생들만이라도 참석시킨다면 더욱
의미있는 행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 (2010. 10. 15 금)
이만주
터키항공 GSA 사장
강아 아씨 묘와 측천무후 능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무덤이기도 하지만, 또한 반대로 동서양 어디서나 무덤이 가장 중요한 관광거리라는 사실이 아이러니컬하다.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집트 기자의 피라밋, 파리의 팡테옹, 북경 인근의 명 13능, 알고 보면 모두가 무덤이다.
중국 서안에 가면 계속 보게 되는 것이 능의 안과 밖이다. 서안을 73능의 도시라 한다. 서안에 군림했던 황제 74명에서 1의 차이가 나는 것은 서안 시 건현 북쪽에 위치한 건능이 당 고종과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인 측천무후의 합장능이기 때문이다. 건능은 다른 황제능의 봉분과 달리 자연의 산을 그대로 이용한 게 특징이다. 그 큰 규모에 기가 질린다.
파리를 관광할 때 사람들은 마르셀 프루스트를 찾아, 에디트 피아프를 찾아 공동묘지를 부지런히 순례한다. 실로 수많은 인걸이 파리 도심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무심하게 잊고 있는 망우리 공동묘지도 파리의 공동묘지에 뒤지지 않는다. 서구의학을 도입하고 국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지석영,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만해 한용운, 국학자인 문일평, 아동문학가 소파 방정환, 화가 이중섭 등 우리 현대사에 공헌한 많은 선인들이 망우리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그래서 혹자는 우리가 아끼고 사랑해야할 진짜 국립묘지는 망우리 공동묘지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지난 6월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송강마을에서 열린 ‘송강 정철 문학축제’에 참석했다가 참으로 애틋한 작은 무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송강이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 시, 사랑했던 한 여인의 무덤이었다.
남원의 동기였던 그녀의 본래 이름은 자미(紫薇)였는데 송강이 그녀를 사랑하자 세상 사람들이 송강(松江)의 ‘江’자를 따서 강아(江娥)라 불렀다. 송강이 1582년 9월, 도승지에 임명되어 임지인 한양으로 떠난 것이 이별이었다. 송강에 대한 연모의 정을 지울 수 없어 함경도로 귀양가 위리안치 중인 송강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발발로 선조는 특명을 내려 송강을 다시 소환하고 1592년 7월, 전라, 충청도 지방의 도체찰사로 임명한다. 강아는 송강을 만나기 위해 홀홀 단신으로 적진을 뚫고 남하하다가 적병에게 붙잡힌다. 자기 몸을 조국의 제단에 바치기로 결심한 그녀는 왜장 소서행장을 유혹하여 얻은 첩보를 아군에게 제공하여 전세를 역전시켜 평양을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 후 그녀는 소심보살이란 이름으로 입산수도하다가 고양, 신원의 송강 묘소를 찾아 한 평생을 마감한다. 그녀의 묘는 송강의 묘가 진천으로 이장된 뒤에도 그대로 남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하지만 죽음 또한 엄청나게 불평등하다.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엄청난 살육을 저지르고도 죽어서 산만한 능에 묻혔건만 강아 아씨는 고양시 한구석 자그마한 봉분 속에 누어 있다. 그러나 큰 무덤이라야 사자의 행복을 보장할 것인가. 오히려 소박하고 호젓한 무덤이 정겹다.
송강이 그녀에게 지어주었다는 시, ‘자미화’로 그녀를 기린다.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펴 /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리라.”
magnif@hanmail.net
발행일 200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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